세월은 가도 저항정신 그대로..정희성 시인 '돌아다보면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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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은 "여유를 갖고 돌아보니 너무 긴장된 삶을 살아온 것 같다"면서 "요즘엔 시를 쉽고 재미있게 쓰려 한다"고 말한다. |
정희성(63)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창비)을 펴냈다.
2001년 발표한 '詩를 찾아서' 이후 7년 만이다. 1970년 등단한 이래 38년 동안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만 시집을 냈다. 그는 1970∼80년대 저항시인으로 주목받았고, 1980년 지식인선언 등에 참여해 연행되기도 했다. 이번 시집은 깊은 연못물처럼 잔잔하지만, 때론 현실을 맵게 비판하며 참여시인의 면모를 보인다. "시대가 날 현실주의자로 만들었지 본질적으로 천진한 낭만주의자"라는 시인의 말이 새삼스럽지 않다.
서정시들로 구성된 들머리는 시집 전체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노년에 접어든 자의 외로움, 도로변 코스모스로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 날 선 감정을 다스리는 지혜 등은 시집 전반에 부드럽게 깔려있다.
"마음이 만약 쓸쓸함을 구한다면/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라/ 젊어 한때 너도 시인이었지/ 출렁이는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바닷가 벤치'에서)
그의 시는 고독, 소외감에 젖지 않기에 읽는 이의 가슴으로 날렵하게 직행한다. 감상과 기교를 뛰어넘은 노 시인의 소탈함은 동심(童心)과 유사하다. 우울을 노래할 때조차 해맑고, 순수하다.
"사람들이 나보고/ 집 안에 틀어박혀/ 말도 안 되는 시만 쓰지 말고/ 비타민 디를 먹고/ 햇볕을 많이 쬐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아득한 전생에 상추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우울증' 전문)
정 시인은 35년간 서울 숭문고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지난해 정년퇴임했다. 작은 텃밭을 가꾸며 은퇴 이후의 삶을 보내고 있다. 시집에 드러난 그의 일상은 담담하고 소탈하다.
"평생 아이들 자라는 것만 보다가/ 퇴임하고 들어앉은 나에게/ 허구한 날 방구들만 지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아내가 불쑥 내민 호미 한 자루/ 하느님, 나는 손톱 밑에 흙을 묻혀본 적 없고/ 상추 한 잎 이웃과 나눈 일이 없습니다"('작은 밭'에서)
고요한 서정시를 주로 담았지만, 투사의 기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한반도 대운하 등 정치현안을 비판한 시편도 있다. 시인의 확고한 신념, 저항정신은 세월이 가도 결이 죽지 않고 빳빳하다.
"이제 더 내다팔 아무것도 없이/ 시장의 논리에 맡겨진 이 나라도/ 대통령도 할 일이 없어졌다/ 보시기에 평화로웠다"('2007년 6월의 마지막 날'에서)
"실용주의를 자처하는 당신들 눈에는/ 시인은 아마도 가장 비실용적인 인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시인은 생태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누가 어머니의 가슴에 삽날을 들이대는가'에서)
정 시인은 권말에 "스스로 세상 밖에 나앉았다고 생각했으나 진실로 세상일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시인의 숙명을 새삼 되새긴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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