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닷새만에 '아침이슬' 잊었다

2008. 6. 2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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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갑수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1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쇠고기 파동'과 관련한 특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배재만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지난 6월 10일,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위대의 함성과 함께, 제가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이라는 노래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

6·10 촛불의 위력을 실감한 이명박 대통령의 6월 19일 특별기자회견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것은 매우 정서적인 발언이었다. 국가원수의 발언으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나약한 면도 있었다. 국가원수가 홀로 어두운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한 술 더 떠 그는 "자기가 오래 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 노래 소리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닷새밖에는 지나지 않았다. 정서적이고 나약한 대통령을 보는 것도 심란한 일이지만, 불과 며칠만에 표변해 버리는 대통령을 보기란 차라리 비감스럽다. 여기서 24일 발언을 잠깐 살펴보자. "일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는 정부 정책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 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대통령은 그 날 청와대 뒷산에서 나라를 위한 걱정과 사색을 한 게 아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그는 겁이 난 나머지 광화문을 컨테이너로 막아 놓고 뒷산으로 피신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과거에 촛불 민심을 '광우병 괴담'으로 치부하거나, "1만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는 식의 배후설보다도 오히려 더 파괴적인 발언처럼 보인다.

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가

이 대통령은 촛불 시위를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쉽게 말해 '대한민국의 국가다운 성격'이다. 구체적으로는 '국민과 영토와 정부를 포괄하는 자치적인 통치 능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에는 정치적인 자율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국가나 집단은 없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조차도 인정한다. 그러므로 어느 면에서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한다"는 말은 '친북 좌파'나 '주사파'라고 하는 것보다 더 악평일 수가 있는 것이다. 매국노나 반역자가 아니라면 국가 정체성을 부인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24일 청와대 대통령실 개편 이후 처음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일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는 정부 정책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 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19일 기자회견때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 청와대 제공

이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촛불 시위자 중 누가 매국노고 누가 반역자라는 것인가?

해외 언론들은 "한국의 촛불시위는 국가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영국의 유수 일간지 <타임스>는 지난 8일, "미국은 일본과 같은 주요 쇠고기 수입국들에 다시 쇠고기를 본격적으로 수출하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은 지난 4월에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전하면서 "한국인들은 이것을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순종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느꼈다"고 보도했다.

또한 미국의 <시애틀타임스>는 8일 편집자 칼럼을 통해 "한국의 시위에서 단순히 쇠고기 수입 이상의 의미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칼럼은 한국의 촛불시위에 대해 "세계 무역 시대에 국가 정체성 수호를 위한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외신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대한민국의 검역주권을 미국에 상납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정치적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일을 누가 저지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이 대통령 말대로 굳이 국가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자면, 정작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는 당사자는 미국이며 또한 이에 순종하는 이명박 정부가 아닐까?

촛불 시위는 쇠고기 문제로 촉발되었지만 뒤로 가면서 '이명박 퇴진'구호가 나온 것은 사실이다. 진중권 교수는 대통령 퇴진 구호가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람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시민 중에는 진정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퇴진을 원해서 그런 구호를 외친 사람도 적잖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민들은 왜 취임한 지 넉달도 안 된 대통령에게 퇴진하라고 외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차적으로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기 때문에 거리로 나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정책에 반대하는 경우라면 정권 퇴진 구호가 쉽사리 나올 리가 없다.

그것은 시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많은 시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다수 국민을 위하지 않고 소수의 특권층만 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보다는 미국의 입장을 더 대변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의문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너는 누구냐?" 즉 "너의 정체는 뭐냐?"를 묻게 만들었고 그것이 곧장 정권 퇴진 구호로 표출된 것이라고 본다.

요컨대 촛불시위는 다수의 시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정체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터무니없게도 자기 개인의 정체성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착각 또는 혼동해버리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촛불시위를 곧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행위로 본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에게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대통령이 곧 국가인가? 조금 표현을 달리 해서 "짐이 곧 국가"라는 말인가? 그것은 17세기 유럽 절대주의 왕정에서나 있을 법한 질문이 아닌가? 진중권 교수는 "촛불시위는 내란"이라고 말한 이문열을 가리켜 17세기 정치인이라고 했는데, 비단 17세기 정치인은 이문열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론조사결과 때문에 고무된 것일까?

한심한 것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촛불집회에 역공을 취한 이는 비단 이 대통령만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24일 국무회의 석상은 촛불집회를 칼질하는 장소나 다름이 없었다.

"촛불시위가 일반 시민과 분리되는 양상이다. 불법적 폭력 시위 철저하게 대처하겠다."(김경한 법무부 장관) "정부도 민생경제 안정을 위해 불법과 폭력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수밖에 없다."(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 장관) "촛불집회가 대정부 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다."(어청수 경찰청장)

그들이 믿는 바는 쇠고기 추가협상의 실체가 밝혀지기 전에 실시된 지난 주말의 <중앙일보>의 여론조사( 촛불 집회 그만해야 58.2%)와 대통령의 사과 회견 직후에 이루어진 한나라당 자체의 여론조사(<여의도연구소> 조사결과, 대통령 지지율 30% 회복, 촛불집회 그만해야 67%)인 것 같다. 그들은 이 두 조사 결과에 한껏 고무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여론에 민감한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사례인 것 같아 일면 다행이기도 한 일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6.10항쟁' 21주년을 맞은 10일 저녁 서울 세종로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대규모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가 시청 앞까지 가득 채우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유성호

아무리 그렇더라도 <중앙선데이>의 조사(촛불 집회 이제 중단해야 58.2%)와 한나라당 자체의 조사( 19일 기자회견 직후 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 결과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 30%대 회복, 촛불 집회 그만해야 67%)만을 보고 일제히 촛불집회를 매도하는 일은 누가 보아도 성급해 보인다. 지난 4월 18일 한미쇠고기 협상이 타결된 직후에 협상안 반대 여론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대운하 역시 초기에는 반대 여론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여론이란 실상이 드러나면서 바뀌는 법이다.

'아침이슬'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가사를 가진 노래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과 이 노래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 6월 10일 집회에 참석해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간절히 바라며 '아침이슬'을 불렀던 시민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난 1987년 6월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후보 수락 연설 중에 헤르만 헤세를 좋아한다고 말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소설가 최일남은 <동아일보>의 날카로운 칼럼니스트로 장안에 회자되고 있을 때였다. 최일남은 헤르만 헤세를 좋아한다는 노태우를 위해 한 편의 칼럼을 썼다. 그 칼럼 제목은 '헤르만 헤세 좋아하네!'였던 것 같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한 편의 칼럼만 쓰라고 한다면 그 제목을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뭐로 해야 할까?

'아침이슬 좋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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