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일깨운 조선활자술의 '금속길' 상상기행


[한겨레] 200년 앞선 금속활자 서구에 전파 '팩션'조선인,교황사절단 통해 성서인쇄 돕고구텐베르크·다빈치 만나 르네상스 꾀해
〈구텐베르크의 조선 1·2·3〉
오세영 지음/예담·각 권 9800원
"서양에서는 인쇄술을 최초로 발명한 것이 구텐베르크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은 교황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하여 얻어간 기술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할 때 교황 사절단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사절단에는 구텐베르크의 친구가 있어 조선을 방문하고 인쇄 기술과 관련한 기록을 가져왔다."
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이 서울 디지털 포럼 2005에서 한 기조연설을 듣고 지은이는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우리가 금속활자를 서양보다 200년 앞서 발명했으니 개연성은 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친구는 누구고, 언제 조선을 방문해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배워갔나.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이 누군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지은이는 교황청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1452년에 '신원이 그 이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의 소개로 교황 니콜라우스 5세를 알현하고 '42행 성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고해 금속활자의 완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원 미상의 인물이 조선과 독일을 연결하는 조선인이 아니었을까? 지은이는 가공의 인물 '석주원'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사이 틈을 메운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팩션'이다.
19살 영민한 금속 정련 기술자(주자소 야금장) 석주원은 세종의 밀명을 받고 명나라로 건너간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했지만, 보수적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닥쳐 반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백성에게 널리 퍼뜨리려면, 서적 대량 인쇄가 필요했다. 세종은 많은 책을 찍어내도 쉬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새 금속활자를 명에서 만들어 오라고 했던 것이다. 석주원은 스승 장영실과 만나 임무를 수행하던 중 명나라 궁중 암투에 휘말려 티무르 제국으로 간다. 티무르 제국에서 마침 그곳에 와 있던 교황 사절단을 만나 구텐베르크의 성서 인쇄를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인쇄술의 발달은 르네상스를 꽃피운 밑거름. 역사적 사실과 허구 이어붙이기는 르네상스 한복판으로 내처 간다.
새 금속활자를 완성한 석주원은 채권업자 흉계에 빠져 쇄락한 구텐베르크 인쇄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유럽을 누비는데, 가는 곳마다 르네상스 시대 걸물들과 마주친다. 피렌체에서 소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금속활자 명성을 듣고 석주원을 찾아와 자동 인쇄기 설계도를 보여준다. 석주원은 소년 다 빈치의 자동 인쇄기를 이용해 르네상스 시대 여러 예술가를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의 독재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발주한 대형 인쇄소 사업을 따낸다. 실제로 다 빈치는 레버를 움직이면 판이 자동으로 종이를 밀어주는 방식의 인쇄기를 설계한 바 있다. 교황청이 발주한 인쇄소 사업을 따내기 위해 로마에 갔다가, 후에 교황 칼릭투스 3세가 된 로드리고 데 보르자 추기경과 그 옛 연인 사이 일에 휘말린다. 보르자 추기경은 옛 애인과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데, 당시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사생아의 존재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보르자 역시 사생아가 있었다. 나중에 값싼 포켓본을 개발해 르네상스 시대 출판왕이 된 알도 마누치오는 야심만만한 젊은이로 석주원과 마주친다.
책이 펼쳐 놓은 상상이 살짝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심지어, 석주원은 은퇴한 뒤 조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콜럼버스의 배를 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오히려 현대 한국인의 상상력이 옹색해진 것일 수도 있다. 석주원이 유럽을 누비던 비슷한 시기 이란에는 철제금속 인쇄기를 발명했던 가차투르 바르다페트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란의 구텐베르크라 일컬어진다 한다. 조선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독일, 실크로드를 통한 금속활자 교류 가능성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때 몇몇 우리 학자들은 한국과 독일의 금속활자가 문명교류사적 배경에서 실크로드 통로를 통해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있다며, 이 통로에 '활자로드'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석주원은 활자로드를 걸었던 수많은 조선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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