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식민지근대화, 교과서포럼이 옳다
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이영훈 박효종 교수가 대표로 있는 교과서 포럼이 '한국 근현대사'를 내놓자 좌파 민족주의 진영에서 친일파의 부활이라며 연일 포문을 열고 있다.
"친일파!"는 한국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단어다.
'빨갱이!'라는 말과 비슷해서 일단 라벨을 붙이기만 하면 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일종의 주술이다.
참여정부 과거사 위원회를 통해 남발되었던 바로 그 딱지다.
친일파라면 일진회(一進會)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의 한 기록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갑오경장 이후 동학도(東學徒)의 잔당들은 각지에 잠복하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백성들의 화제거리도 되지 않았고 밖으로는 지방대에 탄압되어 아무 횡포도 부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 모르게 부서를 정해놓고 국가의 유사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윤시병 등이 일진회를 창설하자 그들은 사람을 각지로 보내 일어나 호응하므로 10일도 되지 않아 13도의 동학도들이 모두 일어나 혹 진보회라 하기도 하고 혹 일진회 지회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을 따르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다."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매천(梅泉) 황현이다.
그는 한일합방의 그날 음독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일기 매천야록은 합방전 정세를 누구보다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1930년대의 다른 기록 또한 다르지 않다.
동학의 큰 물줄기 하나가 진보회 일진회로 나아가는 과정을 기술한 자료들이 남아있다.
교과서 포럼이 혁명 아닌 봉기로 규정해 민족주의 진영의 반발을 불렀던 바로 그 동학에 관한 일부 기록들은 이처럼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민족운동 천도교의 줄기를 생각하면 이들 기록에도 적지않은 왜곡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이면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미화할 이유도, 폄훼할 이유도 없다.
무능한 양반 지배층에 고통받던 상당수의 동학 농민들에겐 근대화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일본이 차악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러시아에 비기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조선의 자력 근대화 가능성이라고 하겠지만 지배계급이었던 유림(儒林)이란 존재는 과연 어떠했나.
사대주의의 총화요 주자학의 거두였던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라는 사당을 만들어 놓고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거국적으로 제사 지내왔던 그들이다.
농민들에게서 제사비용까지 약탈해 갔다.
만동묘를 오르는 계단은 유독 폭이 좁고 가파르다.
누구든 기어서 올라가야 했다.
"황제의 위패가 계신 곳이다!" 상상만 해도 숨막히는 장면이다.
이 기괴한 시대착오가 끝난 것은 명이 망하고, 청도 망하고, 병합도 7년이 더 지난 1917년의 일이었다.
한때의 교과서는 이를 일제의 문화침탈이라고 썼다.
그러나 시대착오와 문화침탈, 둘 중 과연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1937년 12월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유림 10여명이 야밤에 또 만동묘에 숨어들어 제사 지낸 일을 실로 딱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탈레반이나 북한처럼 스스로는 더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정신과 물질이 모두 궁벽한 나라였다.
20년대의 동아일보는 학교 교실이 모자라 비어있던 향교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몰아낸 유림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
향교에서 신교육을 하면 "공자님의 혼령이 어지러워 하신다!"는 이유였다.
동아일보는 '유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이를 개탄하는 긴 사설을 썼었다.
식민지근대화 아니면 또 다른 무슨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자신의 실패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피해의식만 내세우는 우스꽝스런 민족주의 교과서는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바보의 아둔함이요 주자학적 고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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