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삭풍 고뇌' 햄릿을 느꼈다..배우 박지일·연출가 이성열



14년 전.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된다. 부산에서 명성을 쌓았지만 무명에 지나지 않던 배우 박지일(47)은 서울에서의 신고식으로 산울림 소극장 무대에 선다. 그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열연하면서 배우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당시 연출부의 이성열(45)은 조연출, 기획, 소품 등을 두루 맡았다. '죄와 벌'의 소품에 쓰인 도끼, 양동이를 찾아내느라 고생깨나 했다고 기억한다. 이후 대학로 무대에서 배우와 연출가로 만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담론이 사라지고 캔 뚜껑 따듯 일상을 재잘대기 바쁜 최근의 대학로에서 배우와 연출가로 만나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도 인간을 파멸로 이끌고마는 복수의 운명을 한 인간이 거스를 수 있을 것인가, 고뇌하는 '오레스테스'다. 박지일이 맡은 오레스테스는 트로이 전쟁에 나가 10년 만에 승리하고 돌아온 아버지(아가멤논)를 그날 밤 죽이는 어머니(클리템네스트라)를 향해 복수의 칼을 들이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하는 인물이다.
산자들이 살아있음에 숙연해지는 초겨울 작품으로 일찌감치 약속해둔 터였다. 두 사람은 "술집에서는 자주 얼굴을 봤지만 대학로 무대에서는 만나지 못했다"며 "서로에게 중요한 작품이 될 것 같다"고 운을 뗐다.
박지일은 "햄릿 역을 해보지 못하고 중년으로 접어든 게 늘 아쉬웠는데 이번에 맡은 오레스테스의 모습에서 햄릿을 느꼈다"며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점프할 수 있을지, 그 반대가 될지 잘 모르겠다"고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비좁은 소극장 분장실이 불편하고 차가운 지하연습실이 고생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보이체크' '서안화차' '이아고와 오셀로' 등에서의 배우 박지일을 두고 대학로는 그의 존재감이 크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지만 정작 그는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연출을 맡은 극단 백수광부의 대표 이성열에게도 이 작품은 위태로운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최근 2~3년간 '그린벤치' '여행' '물고기의 축제' 등으로 연극계의 이름난 상을 휩쓴 후 도전하는 대작이다. 그는 "유행인지, 취향인지 사사로운 연극이 만연해 있는 요즘 연극성이 살아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며 "작품 속 인물의 대사를 보더라도 고민의 스케일부터 현재와 달라 정서적 울림이 크다"고 말했다. "희랍극에 담긴 내용이 은유적이라 작품을 들여다볼수록 현재의 정치나 권력상황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덧붙였다.
'오레스테스'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은 원작과는 다르다.
원작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친족을 서로 죽이는 광기어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오레스테스의 어머니는 트로이 전쟁에 나가기 위해 어린 딸을 제물로 바치는 남편에게, 또 오레스테스의 누이동생(엘렉트라)은 정부에게 아버지의 침대를 내주고 전쟁에서 돌아온 첫날밤 아버지를 살해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복수의 칼을 간다. 원작에서는 오레스테스도 복수의 화신이지만 두 사람은 고뇌하는 햄릿처럼 그렸다.
이성열은 "이번 작품에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에 대한 복수는 물론 아버지가 일으킨 트로이 전쟁까지 모든 것이 과연 정당한가 끊임없이 묻는다"면서 "정의를 외치며 복수를 결행하는 다른 인물들과 차별된다"고 설명했다. "비록 그것이 신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것인가, 관객이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면 반쯤은 성공"이라고 말했다.
연출가는 재미있는 해석을 덧붙였다. 자신이 만든 명분으로 트로이를 침략하는 오레스테스 아버지의 모습이 미국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과 닮았다는 것. 선악의 기준 없이 자신의 신념에 맹목적인 인간이 '신의 명령'이라며 따르는 '야만적인 믿음'은 저마다 지닌 이데올로기와 비견될 수 있다. 박지일도 "현대를 고대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오레스테스'는 관객들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불편한 연극이 될 수도 있다. 박지일은 "연극과 관객이 만나는 지점이 항상 문제"라며 "화학조미료가 들어가 당장 먹기 좋은 음식도 있고 간이 좀 덜 들어가고 씹기에 거친 음식이 있는 것처럼 골고루 밥상이 차려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 역에 서이숙, 아버지 역에 김태훈 등 연기파 배우들이 소름끼칠 정도로 광기어린 인물들을 연기한다. 이지하, 진경 등 29명 출연. 11월23일~12월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고대 그리스 작품들 잇단 무대 '존재 묻기'
올 공연계에는 고대 그리스 작품을 원작으로 한 무대가 많다. 그리스 비극시인 아이스퀼로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오레스테스'(12월2일까지)를 비롯해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12월2일까지) 등이 공연될 예정이다. 지난 9월 국립극장에서는 그리스 국립극단이 내한해 '엘렉트라'를 선보였고 10월 공연된 '안티 안티고네'도 그리스 고전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여성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댄스 뮤지컬 '오르페오'(사진)도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에 이미지 연극과 현대적인 춤과 노래를 덧붙인 작품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아내를 구하러 지옥에 갔다가 '아내를 돌아보지 말라'는 '지옥의 신' 하데스와의 약속을 어겨 끝내 아내를 잃고 마는 오르페오의 슬픔을 담은 이야기. 이번 작품은 드라마적 구조다. 현실과 신화를 넘나드는 2개의 극중극 형식에 다채로운 춤과 노래가 접목돼 있다. 신화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오르페우스와 그의 아내 에우리디체의 이야기가 현대의 젊은 부부 동욱과 유리의 사랑과 갈등, 화해로 그려진다. 오는 27일부터 12월2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공연 관계자들은 그리스 고대 작품들의 잇단 무대에 대해 "우연의 일치같다"면서도 "인간의 실존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 작품들로 가벼워지고 있는 요즘 공연물들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겠느냐"고 분석한다. 김희연기자
〈글 김희연기자 egghee@kyunghyang.com〉
〈사진 박재찬기자 jcphoto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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