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환의 트래쉬 토크] 페니 하더웨이에 대한 추억

서정환 기자 2007. 8. 1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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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NBA에 반가운 소식이 여럿 들려온다. 90년대 NBA를 수놓았던 슈퍼스타들이 속속들이 복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중에는 돈 때문에 복귀를 결심한 안타까운 선수도 있지만, 돈보다는 명예회복을 위해 복귀를 결심한 선수들도 있어서 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기자의 마음을 가장 움직인 것은 앤퍼니 하더웨이 '페니'였다. 페니의 복귀를 두고 네티즌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선수가 복귀한다는데 뭐가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것이다.

그렇다. 2000년대 이후 기록을 보면 페니는 그다지 주목할 만한 선수가 못된다. 하지만 지금부터 페니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얼마나 인기 있는 선수였는지 한 번 되짚어보려고 한다. 페니의 팬들에게는 향수를 주고, 어린 친구들에게는 페니가 어떤 선수인지 알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센세이션 페니

앤퍼니 하더웨이의 별명 '페니'는 그의 할머니 루이즈 하더웨이가 지어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페니는 어머니가 일을 나가면서 할머니에게 길러져 할머니와 각별한 관계다. 루이즈는 하더웨이가 1페니 동전처럼 귀엽다면서 페니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페니는 2006년 할머니의 90번째 (한국나이로 91세) 생일잔치를 벌였을 만큼 할머니를 좋아한다.

페니는 어렸을 때부터 야구 , 미식축구 , 볼링 , 탁구 , 테니스 등 다양한 운동에서 소질을 발휘했다. 그런데 매직 존슨의 플레이에 반해서 농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농구공을 잡은 페니는 무서울 정도로 연습에 집착했다. 그 결과 고등학교 때 멤피스에서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페니는 트레드웰 고등학교 졸업반 때 평균 36.6점 , 10.1리바운드 , 6.2어시스트, 3.3 스틸 , 2.8블록슛을 기록하며 퍼레이드 매거진이 수상하는 올해의 고교선수상을 수상했다. 멤피스 주립대 진학 후에도 맹활약은 계속되었다.

페니는 대학1학년 때 낙제를 하면서 1년을 쉬었다. 그 당시 총기사건에 연루되어 발에 총상을 입으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공부에 전념하면서 평점 3.4점을 얻어 다시 농구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

91-92시즌 페니는 평균 17.4점 , 7리바운드 . 5.5어시스트 , 2.5스틸 , 1.3블록슛을 기록하며 그레이트 미드웨스트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상과 신인상을 탄다. 그리고 NCAA 토너먼트에서 멤피스를 8강까지 이끌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92년 여름에는 오리지널 드림팀의 연습상대 대학생 올스타로 선발되었다. 당시 멤버에는 앨런 휴스턴 , 그랜트 힐 , 바비 헐리 , 저말 매쉬번 , 크리스 웨버등 미래의 NBA스타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당시 대학생 올스타는 드림팀에 맞서 62-54로 대단한 선전을 했다.

페니는 3학년 때도 평균 22.8점 , 8.5리바운드 , 6.4어시스트 , 2.4스틸 , 1.2블록슛을 기록하며 네이스미스 올해의 선수상과 존 우든 어워드를 동시 석권했다. 대학에서는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다. 페니는 당당히 프로행을 선택했고 멤피스 주립대는 그의 번호 25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넥스트 조던? 매직?

페니는 93년 드래프트 3순위로 골든스테이트에 지명되었다. 그런데 골든스테이트가 드래프트픽 3장과 93년 1순위 크리스 웨버를 맞바꾸기로 결정함에 따라 올랜도로 입단하게 되었다. 당시 올랜도는 92 , 93년 연속으로 1순위 지명권을 가져가 로터리 픽의 폐해를 두고 리그가 한창 시끄러웠다. 당시 올랜도가 트레이드를 하지 않았다면 샤킬 오닐-크리스 웨버라는 무지막지한 골밑듀오가 생길 뻔 했다. 물론 샤크-페니 콤비도 결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페니가 데뷔할 당시 올랜도는 생긴지 5년 밖에 안 된 신생팀이었다. 정규시즌 5할을 넘어본 것도 샤킬 오닐이 등장한 92-93시즌이 처음이었다. 플레이오프 경험도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경험이 없는 대신 잃을 것도 없었다. 올랜도는 괴물센터 샤킬 오닐을 축으로 닉 앤더슨 , 데니스 스캇 , 스캇 스카일스를 중심으로 괜찮은 전력을 구성했다.

당시 샤킬 오닐은 득점의 80%를 덩크로 처리하는 무지막지한 센터였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페인트존 바깥에서의 공격능력이 전무했다. 뛰어난 수비수 닉 앤더슨은 올랜도가 창단 후 처음 지명한 1라운드 선수였다. 이듬해 들어온 데니스 스캇은 3점슛 하나만큼은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현재 시카고 불스의 감독인 스캇 스카일스는 한 경기 30어시스트로 최다기록을 갖고 있는 수준급 포인트가드였다.

페니는 201cm의 장신임에도 볼핸들링과 패스웍이 탁월했다. 신장이 워낙 좋기 때문에 리그의 어떤 포인트가드와 만나도 미스매치를 유발했다. 페니는 이 점을 적극 활용해 포스트업 후 내주는 킥아웃 패스로 외곽슈터들을 살리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워낙 1:1능력과 운동능력이 뛰어나 골밑에서도 경쟁력이 있었다. 골밑에서 우아한 핑거롤로 마무리하는 모습이나 상대센터의 블록슛을 피해 플로터를 올려놓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물론 강력한 슬램덩크도 자주 선보였다. 매직 존슨 이후로 그렇게 다재다능한 장신가드는 페니가 처음이었다. 샤크-페니를 두고 제2의 카림 압둘자바-매직 존슨이라고 칭한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거칠 것이 없었던 차세대 농구 황제

페니는 프로데뷔와 동시에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데뷔 시즌 올랜도를 최초의 50승으로 이끌었고 2년차 시즌에 평균 20.9점 , 7.2어시스트 , 4.4리바운드 , 1.7스틸을 기록하며 올스타는 물론 NBA 퍼스트팀 가드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한다. 당시 리그에서 페니 외에 평균 20점 , 7어시스트를 돌파한 선수는 게리 페이튼과 팀 하더웨이 밖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페니는 페이튼 같은 속공지휘자도 아니었고, 팀 하더웨이 같이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선수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페니는 자신의 득점뿐만 아니라 동료에게도 충분히 공격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올랜도는 주전 5명이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평균 111.8점의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조던이 야구에 외도한 사이 페니가 몰고 온 파장은 강력했다. 너도나도 페니의 1번이 새겨진 푸른색 올랜도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 나이키도 조던을 대신 할 새로운 농구영웅으로 페니를 지목하고 전용농구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페니는 화려한 농구실력과 잘생긴 외모덕분에 엄청난 인기를 몰고 다녔다. 지금 르브론 제임스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94-95시즌 중반 마이클 조던이 복귀를 선언했다. 45번을 달고 나타난 조던은 복귀 후 두 번째 경기인 뉴욕 닉스전에서 55점을 넣으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 때 부터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와 페니의 올랜도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시카고가 8-90년대를 대표하는 전통의 명문이었다면 올랜도는 90년대 떠오른 신흥명문이었다. 90년대 시카고에서 3연패를 달성한 호레이스 그랜트의 올랜도 이적으로 라이벌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시카고와 올랜도는 동부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맞붙었다. 당시 양팀은 5차전까지 교대로 1승을 나눠가졌고 올랜도가 3승 2패로 앞선 상황이었다. 시카고는 종료직전 앞선 상황에서 마이클 조던이 공격을 하고 있었다. 시간만 보내면 시리즈를 최종 7차전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던은 닉 앤더슨의 '23번 보다 45번이 더 막기 쉽다.'는 말에 벌금까지 물어가며 23번을 달고 나올 정도로 승부욕이 발동했다.

하지만 조던은 마지막 공격찬스에서 실책을 범했고 페니는 그 찬스를 덩크로 연결하며 시카고를 탈락시켰다. 돌아온 조던에게 있어서 페니는 반드시 넘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조던은 예전에 비해 운동능력이 떨어졌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페이드어웨이 점프슛을 들고 나와 플레이오프에서 올랜도를 물리치고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조던에게 페니의 존재가 자극이 되었음은 분명했다.

페니는 조던을 꺾고 올라간 NBA파이널에서 휴스턴 로케츠와 상대했다. 페니는 평균 24.5점 , 4.8리바운드 , 8어시스트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하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맹활약에 밀려 4연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비록 패했지만 누구나 페니의 올랜도가 머지않아 우승을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페니는 이듬해 샤킬 오닐이 부상당한 사이 득점본색을 드러내며 평균 27.0점을 기록,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올랜도는 사상최초 60승을 기록했고 페니는 2년 연속 퍼스트팀 가드로 선발되었다.

페니는 그랜트 힐과 함께 드림팀3의 막내로 선발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NBA를 책임질 미래의 슈퍼스타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는 순간이었다.

지긋지긋한 부상의 악몽

96년 샤킬 오닐이 LA 레이커스로 떠나면서 페니는 큰 부담을 떠안았다. 팀의 리더이자 에이스 득점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무리한 출장을 감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 와중에 브라이언 힐 감독과 마찰을 일으켜 그를 해고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페니는 여전히 뛰어난 성적으로 97년 올스타에 선발되었지만 부상으로 59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듬해에는 무릎부상으로 19경기 출장에 그쳤다. 올스타로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결국 페니는 98-99시즌을 끝으로 올랜도를 떠났다.

페니는 2000년 피닉스에 합류해 제이슨 키드와 함께 '백코트 2000'을 구성했다. NBA 최고의 패서 키드와 1,2번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페니의 조합은 엄청난 기대를 모았다. 페니는 4시즌 만에 60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좋은 활약을 했다.

특히 챔피언 샌안토니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페니의 활약이 빛났다. 페니는 3차전에서 17점 , 13어시스트 , 12리바운드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결과 피닉스는 샌안토니오를 3-1로 탈락시키고 2라운드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비록 2라운드에서 샤킬 오닐이 버틴 레이커스에 탈락했지만 백코트 2000의 미래는 밝은 듯 했다.

하지만 페니는 선수생명에 결정타를 맞았다. 두 차례 무릎수술을 받으면서 예전의 운동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며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페니는 농구센스에 의존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렸지만 예전의 슈퍼스타로서의 모습은 없었다. 결국 페니는 03-04시즌 스테판 마베리 트레이드에 얽혀 뉴욕으로 트레이드되는 수모를 겪었다. 뉴욕에서 연봉값 못하는 먹튀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페니는 2006년 2월 스티브 프랜시스의 트레이드에 얽혀 친정팀 올랜도로 복귀했으나 곧바로 방출 당했다. 페니는 샐러리캡을 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팬들은 올랜도의 1번 하면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현재 그 1번은 트레버 아리자가 달고 있다. 올랜도 사상 최초의 영구결번 1순위였던 페니에게 치욕을 선사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인기남

90년대 NBA는 마이클 조던의 존재와 맞물려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특히 90년대 연고대 선수들이 오빠부대를 만들어내면서 NBA선수들에게도 오빠부대가 생겼다. 그 중에서 아마 가장 많은 팬이 있었던 것이 페니가 아니었을까 싶다.

페니는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잘생긴 외모 덕에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마이클 조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유니폼을 팔아치운 것도 페니였다. 십여 년 전 당시 농구잡지계의 양대산맥이었던 루키와 덩크슛에서도 페니가 표지모델로 등장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말이 나온 김에 예전잡지를 한번 뒤적여보자.

월간 루키의 96년 4월호에는 애독자를 대상으로 NBA 선수의 각 포지션별로 인기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무려 1만 2백 52명의 독자가 엽서를 보내 이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그 중 슈팅가드 포지션에서 마이클 조던이 8921표(87% 지지율)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2위 레지 밀러가 321표를 받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지지율이었다. 그리고 3위가 바로 294표를 얻은 페니였다. 4위를 차지한 드렉슬러(215표)를 밀어냈던 것이다. 포인트가드 포지션에서는 페니가 존 스탁턴을 엄청난 차이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당시 NBA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대충 가늠해볼 수 있는 수치였다. 당시 잡지에서는 페니의 브로마이드를 부록으로 주곤 했는데 남학생들은 물론 여학생들도 자신의 방에 붙여놓고 쳐다볼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르브론 제임스가 인천공항을 활보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열기였다.

페니의 농구화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슈퍼스타를 상징하는 것은 시그내쳐 농구화를 갖고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페니는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멋있는 시그내쳐 '에어페니' 시리즈를 갖고 있었다. 에어페니는 농구화애호가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무조건 수집해야 할 농구화로 기억되고 있다.

에어조던으로 대변되는 나이키는 조던의 야구외도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조던을 대신할 농구스타로 페니를 선택했다. '에어 줌플라이트 원' 같은 준시그내쳐를 갖고 있던 페니는 에어페니 시리즈와 함께 일약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다.

페니가 좋은 활약을 하면서 농구화도 불티나게 팔렸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의 컴백과 함께 페니와 조던의 시리즈 광고를 동시에 내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페니의 광고는 http://13gb.com/media.php?media_id=1537에서 볼 수 있다.)

특히 페니가 신었던 에어 폼포지트 원은 에어조던 11과 함께 없어서 못 구하는 명품농구화로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페니의 성적추락과 함께 에어페니 시리즈도 4를 끝으로 단종 되었다. 페니는 뉴욕 닉스 이적 후에도 예전의 명성을 기억하며 에어페니1 뉴욕버전을 신고나오기도 했다. 사실 기자도 그 때 한 켤레를 구입했는데 아까워서 집에 모셔두고 있다. 페니 컴백과 맞물려 농구장에 한 번 신고나가서 농구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페니의 컴백을 환영한다!

사실 기자라는 명함을 걸고 나면 특정선수를 대놓고 지지하지 못한다. 특히 국내선수를 평가할 때는 이런저런 사견으로 안 좋은 소문이 개입할 수 있어서 더욱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번에 컴백한 페니 하더웨이 같은 경우에는 드러내놓고 응원을 해보고 싶다.

페니가 컴백해서 못해도 좋다. 그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다시 나오는 것만 해도 고마울 지경이다. 아마 많은 팬들도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앨런 휴스턴 , 레지 밀러의 복귀도 환영하는 바이다.

많은 팬들이 자신들의 우상이 괜히 복귀해서 르브론 제임스 , 드웨인 웨이드에게 덩크슛이나 얻어먹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는 간다. 마이클 조던이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덩크슛에 실패했던 장면은 누구나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팬이라면 그런 노장선수들의 열정도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어떤 선수가 컴백하면 어떤 기록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식의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페니는 이미 컴백을 결정했고 샤킬 오닐과 11년 만에 한 팀에서 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페니는 은퇴 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코비 브라이언트 , 트레이시 맥그레디 , 조 존슨 , 길버트 아레나스 같은 선수들이 어린 시절 자신을 우상으로 삼아 올스타가 되었듯이 제2의 코비 브라이언트를 직접 길러내겠다는 것이다. 페니는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로 활약했고, 유소년 농구교실에 30만 달러를 쾌척할 만큼 어린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페니의 오른쪽 팔에는 'The storm is over'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 말 처럼 폭풍같은 그의 선수시절은 지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페니의 선수생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페니가 선수로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뛰어난 농구선수로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_ⓒ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JB미디어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07-08-14 서정환 기자(mcduo34@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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