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국기 모독

민족주의가 넘실거리는 경연장이라면 단연 스포츠를 꼽을 만하다. 지구촌을 후끈 달구는 월드컵이 비근한 예다. 축구를 빌미로 전쟁까지 치른 남미 엘살바도르과 온두라스의 축구광들뿐 아니라 국내 남녀노소도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지난해 '이것이 진짜 축구다'라는 단행본을 낸 공동저자들은 "월드컵은 4년을 주기로 발발하는 합법적인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이 합법적인 전쟁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국기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한다. 당연히 국가 기념행사에도 빠질 수 없고 국가 수반이 공공 연설을 할 때도 잘 보이는 곳에 배치된다. 국제 스포츠 대결에서 국기를 흔드는 것은 꽹과리를 치며 신명을 돋우는 것 못잖게 중요하다. 같은 운명체라는 교감을 드러내는 상징이어서다. 지난해 독일월드컵 선전을 성원하는 붉은악마 응원전이 펼쳐진 서울광장에도 어김없이 태극기가 나부꼈다.
인간 거주공간을 벗어나도 국기는 말을 한다. 히말라야 고봉이나 남극, 북극에 국기가 게양되는 까닭이다. 대기권 밖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과 옛 소련의 신경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달 착륙 경쟁에 종지부를 찍은 미국 국기가 좋은 예다. 아폴로11호 승무원은 1969년 달 표면에 성조기를 게양해 냉전시대의 세계인에게 '미국의 승리'를 알렸다. 당시 공기가 없는 달 표면에서 성조기가 펄럭이는 모습이 의혹을 빚어 스튜디오 촬영분이란 '음모론'이 유포되기도 했지만….
청와대가 대통령 영상메시지를 전하는 화면에 태극 문양을 잘못 그린 '사이비 태극기'를 몇달간 내보냈다가 시민의 지적을 받고서야 폐기했다고 한다. 태극기를 전혀 모르는 '먼 나라' 사람들도 아닌데 '국기 모독'을 앞장서 저지른 셈이다.
올해 1월26일 신규 제정된 '대한민국국기법'은 제5조에서 "모든 국민은 국기를 존중하고 애호해야 한다"면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국기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의무화했다. 또 행정자치부는 '국기법' 제정을 기려 엊그제 '태극기를 주제로 한 글짓기'를 공모했다. 민족의 가치를 유난히 앞세우는 청와대가 스스로 국기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판국에 어떤 글이 공모될지, 어떻게 나라사랑을 일깨울 것인지 궁금하다.
이승현 논설위원
* 제17대 대선 특별 사이트 http://17dae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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