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의 주역, '광주의 해방구' 서현교회 변남주 목사
【광주=뉴시스】
6월 항쟁 당시 광주에는 해방구가 있었다. 거리에 나섰던 학생들과 넥타이 부대의 피난처 이자 쉼터였던 곳. 서울에 명동성당이 있었다면 광주에는 '서현교회'가 있었다.
서현교회는 당시 거리에 나섰던 군중들 사이에서 '해방구'로 통했다. 최루탄을 온몸에 뒤집어 쓴 채 들어서고 헌금 한 푼 없이도 숙박이 가능했던 곳이다.
당시 서현교회 담임목사였던 변남주 목사(73). 변 목사는 군부정권의 6.29선언을 이끌어 냈던 6월 항쟁 기간을 '위대한 민주시민의 승리'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6.29선언이 있기까지 12일 동안 매일 150명에서 300명에 가까운 군중들이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학생에서부터 회사원, 농민들까지 직업도 다양했죠. 모두들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밥값이요? 교회 공금은 못 쓰니까 뜻 있는 분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했죠"
서현교회는 언덕진 도로 위편에 위치한 데다 주변에 골목이 많아 지리적으로도 데모 군중들이 피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변 목사는 예배시간 임에도 최루탄을 흠뻑 뒤집어 쓴 채 불쑥 들어오는 학생들을 숨겨주기 일쑤여서 일부 교인들의 원성을 샀다.
"나중에야 웃으면서 이야기 했지만 당시에는 하마터면 교회에서 퇴출당할 뻔했습니다. 신성한 예배당을 대모장으로 만든다는 교인들의 지적도 일리가 있거든요. 하지만 민주화를 위한 시대정신의 실천에 교회도 동참해야 한다는 주위분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변 목사는 결국 오전에 데모하러 나가고 오후에 휴식하러 들어오는 군중들과 교회에서 12일 동안 함께 하며 감격의 6.29선언을 맞았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전격 수용한 6.29 선언을 하자 교회 안은 학생들의 환호성으로 들썩들썩 했습니다. 당시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감동이었죠. 그날 밤 그렇게 역사의 소명의식을 간직한 채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시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시민들도 마음은 한 가지였습니다"
광주시의회 강박원 의장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전남도지사 비서실장이었던 강 의장은 초등학교 동창생인 변 목사에게 전화해 "군부정권이 연행할지 모르니 당분간 피신하라"며 정보기관의 동향을 몰래 알려주기도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희생자 장례식을 집례했던 변 목사는 "5월 광주의 대동정신이 6.10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철옹성 같은 군부정권을 무너트렸다"며 "하지만 그 과정에서 채 피지도 못하고 쓰러진 젊은 영혼들이 너무 많았다"고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변 목사는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이 아직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삶에 허덕이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고귀한 피를 뿌린 희생자들의 유족에 사회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1987년 6월은 그렇게 젊은 투사들의 고귀한 피와 전국민의 가슴속 울분으로 민주와 자유의 갈증을 해소했다.
6월 항쟁으로 싹을 틔웠던 민주화. 20년이 흐르면서 수 많은 투사들을 자양분 삼아 이제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젊은이들과 민주화의 소통을 갈망했던 변 목사의 머리에도 어느새 하얀 서리꽃이 내려 앉았다.
<관련사진 있음>
맹대환기자 mdhnew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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