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외로운 바다무덤 주인장을 기리며

2007. 5. 1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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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왕릉이라고 하면 중국의 진시황릉이나 이집트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를 떠올린다. 여기에 일본이 가세하여 오사카에 있는 인덕천황릉이 세계 최대의 고분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릉은 인도의 타지마할이라고 말한다.

진시황릉의 내부에는 수은으로 만든 강과 바다가 있고, 지상의 궁전을 그대로 재현한 지하궁전이 있다고 한다. 또한 왕릉 입구에서는 수 천 기의 병마용이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약 148m에 달하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기하학적인 건축기법이 동원된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또 어떤가?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자한이 아내 뭄타즈 마할을 위해 만들었다는 무덤이다. 타지마할은 그 완벽한 대칭구조와 눈부신 대리석, 정교한 상감무늬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자 건축물로 유명하다. 인덕천황릉의 경우, 그 크기가 거대한 것만은 사실이다. 제일 긴 쪽의 길이가 자그마치 485m나 되니 일본인들이 자랑할 만한 고분인 것이다.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가장 희귀한 수중왕릉

멀리서 본 문무대왕릉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거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세계 유일의 왕릉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경주 감포에 있는 '문무대왕릉'이다. 왜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왕릉인가? 너무나 신기하게도 왕을 수중에 모신 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왕릉과 가까운 곳에 감은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의 금당 밑에 왕릉과 통하는 길이 있었다고 해서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능이기 때문이다.

문무대왕은 통일 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왕이었다. 김춘추의 장남인 그의 속명은 김법민 이었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둘째 동생인 문명왕후였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후예이니 결국 문무대왕도 가야의 후예인 셈이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릉이 문무대왕 대에 조성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외가의 조상인 김수로왕을 문무대왕이 예우하기 위해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신라 30대 왕인 문무대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에 용렬하게 뛰어 들었다. 이미 멸망한 백제를 확실하게 편입한 후,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당나라와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여 승리한 후, 마침내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 이남의 땅을 완전히 통일시킨 것이다.

백성 수탈ㆍ동원하는 거대 건축물 대신 남긴 유언'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 지키게 해달라'

위에서 본 왕릉

통일 전쟁을 끝낸 문무왕은 질기게 가지고 있던 생명의 끈을 가볍게 놓아버렸다. 자신의 소임을 다 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문무왕은 통일 신라의 기초를 닦아놓은 후,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홀연히 이승과의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아름다우면서도 숭고한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자신의 시체를 화장한 후 그 유골을 동해에 안장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세상에 그 어느 왕이 이렇게 아름다운 유언을 남길 수 있었을까? 진시황은 오로지 자신의 사후 영화를 위해 수 십 만 명의 민중을 동원하여 거대한 지하 궁전을 지었다. 쿠푸왕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들은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권위와 영화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타지마할 또한 인도 백성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고통의 건축물에 불과하다. 수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추앙받지만 샤자한이 이 건물을 지으면서 그 얼마나 많은 민중을 수탈했겠는가.

경주 시내에서 감포 가도를 달려 포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문무대왕릉. 양북면의 봉길 해수욕장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바다 능이 있다니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해위에 외롭게 떠있는 바위섬이 바로 문무대왕릉이란다.

겉보기에는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이 바위섬에 능이 있다니? 답은 바위섬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쉽게 찾아 진다. 네 개의 바위 섬 안에 십자로 난 수로가 있는데, 그 수로 안에 관을 닮은 넓적한 바위돌이 하나 있는 것이다. 문무대왕의 유골은 바로 이 대석 밑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말 희귀하면서도 신기한 왕릉이 아닐 수 없다.

양지바른 무덤자리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감은사지 금당터

그러나 문무대왕의 수증릉은 아직 그 정확한 실체가 밝혀 지지 않은 신비의 능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시신을 화장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그의 유골을 이 바위 밑에 안장했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뼛가루를 이 바위에 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이곳이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유골이 어디에 있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수중에 묻히겠다고 한 그 마음이다. 양지바른 곳의 화려하고 웅장한 능을 포기하고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바다에 묻히겠다는 그 숭고한 정신이다. 이것이야말로 백성과 나라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인 것이다. 문무대왕은 진시황이나 쿠푸왕과는 격이 다른 높은 정신으로 가장 숭엄한 무덤을 가진 왕이 된 것이다.

문무대왕릉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감은사이다. 문무왕 생전에 짓기 시작한 이 절은 그의 재임 시에는 완성되지 못하고 그의 아들 신문왕에 의해 완공된다. '은혜에 감사하는 절'이란 뜻의 감은사는 부왕인 문무대왕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절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재미있는 전설 하나가 내려오는데, 이 감은사지의 금당 밑으로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참 황당한 이야기지만 이 전설이 지닌 상징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만큼 호국지룡이 되고자 하는 부왕의 뜻을 아들인 신문왕이 받들었다는 이야기다. 추측컨대 금당 밑에 작은 도랑을 하나 만들어 바닷물을 동해로 흘려보내는 시늉을 하지 않았을까?

감은사지 금당 밑에는 '호국지룡' 드나드는 수로가 있다?

감은사지 동탑

감은사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가 바로 동탑과 서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쌍 탑이다. 국보 제112호인 이 쌍 탑의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 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 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기하학적으로 면밀히 계산된 비율에 따라 조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탑은 통일 전의 1탑 양식에서 벗어나 쌍 탑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감은사지 창건 때 같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면 가장 오래된 석탑이 된다고 한다.

무심한 갈매기떼 날고

문무대왕릉은 그 실체 여부에 상관없이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의 덕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정말로 이 바위섬 안에 그의 유골이 있는지도 모르고, 후세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미화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삼국통일이 잘 못 되었다고 비판한다. 또 다른 혹자는 당시 삼국은 완전한 외국이었기에 통일전쟁이 아닌 정복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문무대왕릉은 이 모든 잡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푸른 동해에 외롭게 떠 있을 뿐이다. 김수로왕릉은 거대하게 축조한 반면에 정작 자신은 동해의 작은 바위 안에 묻힌 문무대왕. 그의 높은 정신세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흰 빛의 갈매기가 바위섬을 오갈 뿐이다.

┃국정넷포터 김대갑(kkim40@hanaf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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