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민 산동반도에 '제' 나라 세웠다

2007. 3. 2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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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책·인터뷰 / 중국속 고구려 왕국, 제' 쓴

지배선 교수

"특종을 한 기분이랄까요. 흥분해서 책을 쓰기는 처음입니다."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더불어책)를 쓴 연세대 지배선(60) 교수(역사문화학과)는 중국역사서 <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태평어람> 등에서 고구려 유민이 세운 '제'나라의 흔적을 찾아내 55년 흥망사를 재구성해 냈다.

"이정기-이납-이사고-이사도 등 4대가 765~819년에 걸쳐 중국 산동반도 일대를 통치했어요. 그들 자신은 물론 당 조정에서도 '제'가 고구려인의 나라라는 의식이 뚜렷했습니다."

제나라의 강역은 최대 15개주 18만㎢로, 통일신라보다 약간 크고 한반도보다 작다. 2대 이납 때인 782년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제로 하고 도읍인 운주를 동평부로 개명했다. 문무관료인 백관을 임명해 나라의 틀을 잡고 지방행정 단위를 주로 나누어 행정책임자로 자사를 두었다.

"당은 이정기, 이납에게 중서문하평장사라는 관직과 함께 살인에 대한 면책권인 '철권'까지 주었어요. 제의 사법권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당과 제는 국가연합이란 성격을 띠게 된 거죠."

제땅은 신라, 발해와 당 사이의 교역로. 이정기와 이납, 이사도에게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라는 관직이 주어진 것은 제가 3국간의 무역을 관장했다는 증거로 본다. 거기에다 소금, 철, 구리의 산지로 막대한 재화를 쌓아 당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분석한다. 법령이 하나처럼 공평한데다 부세마저 균일하게 가벼워 백성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668년 이후 금방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는 궁궐, 능침, 종묘를 만들었어요. 당의 제후국이 아니라 독립국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한 거지요. 당은 작위에 합당할 정도로 자제하라고 부탁하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이사도는 수차례 낙양을 공격하고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을 암살했다. 하지만 낙양공략이 실패하고 이웃 절도사가 피살되면서 3개주를 떼어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고구려 여인들은 병사가 수십만인데 왜 땅을 떼어주느냐면서 반대합니다. 싸우다 지면 그때 주어도 늦지 않다면서요."

이씨 왕조는 당의 집중공략과 내부자 반란으로 무너진다. 전후 고구려인 2~3천명이 당에 의해 살해됐다고 지 교수는 말했다. 이는 중국쪽에서 고구려를 완전히 이민족으로 인식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본다.

"제나라를 중국에서는 흉려(凶麗), 일본인 학자는 괴뢰집단이라고 폄하하고 있어요. 우리 사서에서는 딱 한마디 언급할 뿐입니다."

7월에 당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이 장차 토벌하고자 하여 조칙으로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와 우리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칙지를 받들어 순천군장군 김웅원에게 명해 갑옷을 갖춘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삼국사기 본기 헌덕왕 11년)

"우리의 숱한 유학자들이 구당서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중국 영향력이 커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추측해요. 부끄러운 일이죠."

한국과 중국에서 모두 잊혀진 고구려 유민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 교수의 서술방식은 원사료를 제시하고 이를 당대의 시대배경적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해 재해석하는 식이다.

"고선지, 흑치상지 휘하에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많았다고 주장한 중국인 학자한테 물어봤어요. 근거 사료가 있느냐고. 무슨 사료가 필요하냐,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하더군요." 사서는 당연한 사실까지 기술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인디애나 객원교수 시절(1999~2000) 고선지와 흑치상치를 연구하는 미국학자를 만나 자극을 받았다면서 앞으로 유목기마민족과 우리민족과의 관련성을 캐볼 생각이라고 전했다.

"한국사는 개별사가 아닙니다. 주변국가의 역사와 유기적으로 연결해 연구해야 합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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