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역사학자 "모용 선비족은 黃帝의 후예"

2007. 2. 2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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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뿌리 다른 이민족을 '염황자손'으로

"황제족의 중국 북방 활동설 신뢰성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 4세기에서 5세기까지 지속된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 시기 5호의 하나인 연(燕)나라를 세워 북방의 패권을 다투던 모용선비(慕容鮮卑)족이 사실은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주장이 한 역사학자에 의해 제기됐다고 중국 언론이 27일 보도했다.

이는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 존재했던 모든 고대 국가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이른바 '다민족 통일국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순수 한족과 전혀 다른 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공인돼 온 고대 이민족을 중국인들이 민족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황제의 후예라고 강변하는 셈이어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중국인들에게 흉노(匈奴)족, 갈(갈<羊+曷>)족, 강(羌)족, 저(사람인변 없는 低)족 등과 함께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로 알려져온 모용 선비족을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의 삼연(三燕)문화연구소 레이광전(雷廣臻) 회장.

역사학 교수이기도 한 레이 회장은 "모용선비족이 문자를 갖지 못해 그 족속에 관한 내용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황제의 후손이라는 기억은 아주 명확하게 갖고 있었다"면서 몇몇 역대 전적의 기록을 그 증거로 들었다.

레이 회장에 따르면, 명(明)나라 양신(楊愼)의 '승암시화(昇巖詩話)' 가운데 "모용씨는 헌원(軒轅)의 후손임을 자처했다"고 돼있는데 이 헌원이 바로 황제다. '산해경(山海經)'에도 "북적(北狄)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황제의 후손을 시균(始均)이라 하고 시균은 북적에서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나온 '진서(晉書)'와 '북사(北史)'는 이 같은 산해경의 언급을 인용, "시균은 선비족의 시조"라고 기술했다. 특히 진서에는 진나라에 의해 '선비도독'으로 봉해진 모용외(慕容외<廣에서 黃대신 鬼>)에 대해 "창려극성(昌黎棘城)의 선비인이고, 웅(熊)씨의 후손인 그의 선조는 대대로 북이(北夷)에 살았으며 동호(東胡.흉노)라고 했다"고 돼있다.

레이 회장은 "진서에 나타나는 '창려극성'은 지금의 랴오닝성 이(義)현이고, 이른바 '웅씨의 후예'라는 것은 바로 황제의 후손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서에 모용선비가 도읍한 곳으로 나와 있는 '자몽지야(紫蒙之野)'는 고증 결과 서요하(西遼河) 상류, 즉 대흥안령 이남, 연산(燕山) 이북의 광대한 지구으로서 이 곳은 바로 최근 20-30년 동안 고고학자들이 주목해온 홍산문화(紅山) 구역"이라고 밝혔다.

중국고고학회 궈다순(郭大順) 상무이사는 이와 관련, 황제족은 북방 유목.어렵부락의 특징대로 자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정처가 없었다면서 "요하문명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 앙소(仰韶)문화와 홍산문화의 남북접촉 등의 문화관계로 볼 때 5제(五帝) 전기의 여러 대표적 인물들이 북방에서 활동했다는 주장은 신뢰성이 있다"고 말했다.

1981년 새롭게 제시된 '다민족 통일국가론'을 뒷받침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국 고고.역사학계 는 동북공정 본격 착수 전인 1996-2000년에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추진, 전설적인 나라로 여겨지던 하(夏)를 실제 존재했던 국가로 공식화해 중국의 역사시대를 1천229년이나 끌어올렸다.

이어 2001-2005년에는 제1차 '중화문명탐원(中華文明探源)공정'이라는 대규모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3황5제(三皇五帝)'를 실제 역사에 편입해 자국의 역사를 1만여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지난해부터 현재 제2차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 황제 = 염제(炎帝) 신농(神農) 등과 함께 중국의 전설적 제왕들인 3황5제에 포함되는 가상의 인물이다. 치우(蚩尤)의 난을 평정하고 천자가 됐으며, 집.의복.배.수레.활 등을 발명하는 한편 문자.음률(律).도량형.의술.달력 등을 제정한 중국 문명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진다.

중국인들을 일반적으로 '염황자손(炎黃子孫)'을 자처하며 염제와 황제를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으나 불멸의 중국 고대 사서인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전설이라며 아예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은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황허(黃河)풍경명승구에 '염황 2제 조각공원'을 건설하고 이곳에 세계 최대 규모인 높이 106m의 염제와 황제(黃帝)의 조각상(염황 2제 조각상)을 공사 착수 20년 만에 완공했다.

◇ 모용 선비 = 모용씨는 흉노(동호)를 구성한 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선비의 한 세력. 중국 진(晉)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遼東).요서(遼西) 지방을 무대로 활동한 선비족 내부에서는 3세기 이후 모용씨와 우문씨(宇文氏), 단씨(段氏), 척발씨(拓跋氏) 등 4개 세력이 주도권 다툼을 벌인 끝에 4세기 초 모용씨가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당시 모용 선비의 우두머리가 모용외(269-333년)였고,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황<皇+光>. 297-348년)이 세워 스스로 초대 왕이 된 전연(前燕)은 5호16국의 5호 가운데 하나로 한창 때의 강역은 현재의 산시(山西)성, 허난(河南)성, 안후이(安徽)성, 장쑤(江蘇)성, 랴오닝(遼寧)성의 일부에 걸쳐 있었다.

모용황은 서기 339년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신성(新城)을 공격한데 이어 342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는가 하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갔다가 돌려주기도 했다.

모용 선비는 370년 전연이 망한 뒤 다시 후연(後燕), 남연(南燕), 북연(北燕)을 잇달아 세웠으나 마지막 모용 선비의 왕국인 북연이 436년 북위(北魏)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랴오닝성 차오양은 전연, 후연, 북연 등 3개 모용 선비 국가가 도읍했던 곳이어서 '삼연고도(三燕古都)'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d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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