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퐁, 무덤까지 따라간 나치부역

입력 2007. 2. 21. 17:41 수정 2007. 2. 2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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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치 협력자'가 훈장과 함께 묻힐 자격이 있는가?

17일(현지시각) 숨진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모리스 파퐁(96)의 무덤에 그의 나치 협력 전력이 밝혀지기 전에 받은 훈장을 함께 묻는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논란은 '변절'로 점철된 그의 삶을 되짚어 보게 하고 있다.

파퐁의 나치 전력이 밝혀진 것은 그가 정부의 예산장관이었던 1981년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아버지를 잃은 한 학자가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정부 창고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먼지 쌓인 서류를 발견했다. 서류에는 어린이 223명 등 유대인 1690명을 포로수용소로 보낸 파퐁의 서명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7만4천여명이 수용소로 이송돼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소르본대학 출신의 엘리트인 파퐁은 2차대전 때인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나치와 손을 잡았다. 그는 나치의 꼭두각시 정부인 비시 정부에서 1942~44년 프랑스 남부도시 보르도에서 시정의 2인자로 일했다. 그는 유대인을 포로수용소로 보내는 업무를 맡았고, "기꺼이 협력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처음에는 외국인 유대인, 그 다음에는 프랑스 유대인을 잡아들였다.

나치 부역자에서 관료로=독일의 패전이 눈에 보이자 그는 변신했다. 프랑스 저항세력인 레지스탕스에 나치의 활동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파퐁은 전후 철저하게 진행된 나치 부역자 척결에서 살아남았다. 보신에 성공한 그는 종전 뒤 샤를 드골 정부 시절 랑드 지방 지사로 임명됐다. 이후 승진을 거듭했고, 58~66년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다. 62년에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78년에는 예산장관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과거가 드러나면서 97년 87살의 나이에 법정에 섰고, 98년 '반인도주의 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95년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프랑스의 책임을 인정한 뒤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를 자부하는 프랑스에서 비시 정부에 부역한 관료의 뒤늦은 처벌논란은 프랑스의 아픈 기억을 들쑤셨다. 재판정에 선 그는 "나는 위에서 시키는 일을 했고, 나치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는 항소에 앞서 99년 스위스로 도망하기도 했다. 2002년 9월 질환으로 석방되기까지 99년 10월부터 약 3년간을 감옥에서 짧게나마 역사의 죗값을 치렀다. 2004년에는 박탈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착용한 사진을 주간 <르푸앵>에 실어 2500유로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끝나지 않은 논란=파퐁 쪽은 "반드시 훈장과 함께 안장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고 비판받는 그가 훈장까지 안고 무덤에 가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집권 대중운동연합의 베르나르 아쿠아예 의원은 "시라크 대통령이 개입해서, 법이 존경받고 훈장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 유대인학생연맹은 "그를 범죄자이자 프랑스의 유대인 학살 책임의 상징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아에프페>(AFP) 통신에 밝혔다. <인디펜던트>는 "파퐁은 야심적인 관료가 얼마나 쉽게 야만적 정권의 하수인이 되는지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아야 한다"고 평가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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