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과 결별한 '오캄포의 환상'

2007. 2. 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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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이렇게 읽었다 /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

때때로 죽는다는 것은 단지 한 장소에서 떠나가는 것이며,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과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거부하는 망명자는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죽음을 찾는 망명자는 낯선 세계에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고통의 부재를 발견한다. …몇 달 전 글쓰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전에 떠나갔던 세계가 아니라 내 이야기(살아가면서 쉼없이 바로잡아야 할, 머뭇거림투성이의 이야기)의 연속인 다른 세계로 돌아갔어. 내가 죽지 않았어도 나를 찾지 마. 또 내가 죽어도 찾지 마. 내가 잠든 사이에 당신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게 정말 싫었어.

<연속>이란 단편소설의 화자는 소설가다. 그녀는 위선과 기만, 사랑, 질서의 고리를 끊기 위해 그녀 주위의 수많은 관계들을 학대하고 부순다. 그녀는 관계들의 중심에 있는 남편에게 떠나겠다는 것, 혹은 죽겠다는 것을 고하며 편지이자 소설을 써내려간다. '연속'은 다름 아닌 소설가인 화자가 쓴 소설, 또 소설 바깥에 있는 삶, 또한 완전한 바깥에 있는 작가 실비나 오캄포의 '연속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실비나 오캄포의 소설집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엔 표제작을 포함해 분량이 자유로운 여러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이 <연속>이다. 죽기 위해, 떠나가기 위해 타인과의 고리를 끊는 이야기. 타인과의 관계의 습관을 버리는 이야기.

떠나갔던 세계와 떠나온 다른 세계. 그 다른 세계는 실비나 오캄포가 그렸던 소설들이다. 두 세계의 간극은 익숙한 세계를 부수고, 끊임없이 떠나가려 하고, 떠날 수 없을 땐 익숙한 것에 균열을 내며 만들어진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실비나 오캄포는 환상문학의 테두리 안에 분류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환상문학의 대가라 불리는 보르헤스나 보르헤스와 절친한 문학 동료였고 오캄포의 남편이었던, 그 역시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의 것과는 다르다. 오캄포의 환상문학은 불온하고 악질적이고 극단적인, 그녀 자체의 환상에 기인한다. 그래서 그녀의 '환상'은 환상문학의 가장 이질적인 영역으로 분류되면서도 일상의 바깥을 꿈꾸는 '환상'이라는 단어에 충실하다. 그 바깥은 익숙한 것, 질서의 해체와 파괴와 변형. 그것들이 자아내는 공포다. 그 공포는 은밀한 쾌감을 지녔다.

오캄포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무언가 악의적인 음모에 차 있으며 파괴적이다. 아이들은 수동적이라거나 순수하다는 통념적 이미지를 배반한 채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로 군림한다. 남성작가들이 탄생시킨 순응하는 여자와 아이가 다른 목소리를 낼 때, 숨겨진 목소리를 낼 때 오캄포 문학의 매력적인 생명이 움튼다.

반란의 환상은 비단 생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벨벳 드레스가 부인을 옥죄고 펜이 제 작가를 선택하며 밧줄이 제 주인의 심장을 찌른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 역시 천국과 지옥은 선악의 구도가 아닌 망가진 열쇠나 버드나무 새장, 우유잔 하나 때문에 천국에 떨어질 수도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는 변덕스러움에 관한 보고서일 뿐이다.

박연실/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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