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밥]정태춘·박은옥 '저 들에 불을 놓아'
내가 살고 있는 이천은 쌀의 고장이다. 이제 추수도 다 끝나고 벼 말리기도 끝났다. 볏짚들이 흩어져 있는 논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천 사람들의 쌀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천이 고향인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이천 토박이들은 밥을 먹으면서 밥에 대한(반찬이 아니라) 품평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단다. 이천 사람들은 이런단다. 예컨대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오늘 이거 새로 찧은 쌀이다" 하시면, 다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네요" "촉촉하고 냄새가 부드럽네요" 등등 한마디씩 품평을 한다는 것이다. 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작년부터 이천 쌀이 아닌 양평 쌀을 먹고 있다. 유기농 쌀을 먹기 위해서이다. 이천의 보통 슈퍼마켓에서 파는 친환경쌀은 저농약쌀 한 가지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농약을 써서 키운 보통 쌀이다. 그에 비해 양평군은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군 전체에서 농약을 없앴고, 그래서 양평군의 슈퍼마켓에 가면 친환경의 등급표가 붙은, 놀랄 만큼 다양한 브랜드의 쌀과 농산물이 많다.
작년, 아는 분의 소개로 양평에서 유기농으로 쌀을 생산하는 농가와 연결이 되어 직거래를 한다.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나, 도정을 덜한 현미를 먹을 양이면 정말 좋은 쌀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다. 아니, 그보다는 좀더 직접적으로 쌀 수입 이야기가 한창이던 때에 그 결정을 내린 듯하다. 그 전에도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유기농 농가를 찾아 직거래를 결행하게 된 것은 확실히 작년 쌀 개방의 충격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이 너무 미미했던가. 쌀 개방의 시대에 이제 우리 쌀이 살 길은 친환경쌀 생산뿐이라고 외쳐댔건만, 정작 작년 생산된 친환경쌀은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단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친환경쌀을 골라먹는 사람은 소수인 모양이다.
1.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가누나 /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 산 너머로 기울고 /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 눈물 자꾸 흘러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에 /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2.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저기 불 붙인다 /연기만큼이나 안개가 들판 가득히 피어오르고 / 그 중 낮은 논배미 불꽃 당긴 짚더미 낫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 뜨거운 짚단 불로 마지막 담배 붙여 물고 / 젖은 논바닥 깊이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정태춘·박은옥 '저 들에 불을 놓아' 1·2절
선명하고 구체적인 이미지가 빛나는 이 노래는 바로 이 계절 농민들의 착잡함으로 과장이나 흐느낌 없이, 아주 냉철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스케치하듯 그려낸 수작이다. 짚 태우는 연기와 안개가 어우러진 속에서, 매운 연기에 눈물 닦으며 마른 짚단에 불을 붙이는 늙은 농민의 모습, 빈 논을 떠나지 못하고 낫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그 불에 담배 하나 피워 무는 그 무심한 동작 속에서 우러나오는 착잡함이 아주 진하다.
심심파적 삼아 듣는 노래로서는 지나치게 무겁다 싶은 가사이지만, 이를 박은옥의 곱고 여린 목소리에 실어, 서정성을 잃지 않고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늘 센티멘털한 가을노래가 아니라, 이렇게 볏짚 냄새 실린 가을노래 또한 감동적이지 않은가.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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