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읽다]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 (The Dark Lady of DNA)

2006. 9. 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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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삶은 경탄스럽다. 때로는 가슴 아픈 천재성도 있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는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과학계의 그런 대표적 인물은 로잘린드 프랭클린(1920~58)이다. 그는 DNA 이중나선 구조의 진실에 가장 먼저 다가간 과학자였지만 노벨상의 영광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역사에서도 이름이 지워질 뻔했다. 그러나 사후지만 다행히 페미니스트 역사가들 덕분에 지금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전기작가 브렌다 매독스의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The Dark Lady of DNA·양문 발행)에는 페미니스트들의 울분 섞인 폭로는 없다. 그저 방대한 사료조사를 바탕으로 영국 유대인 상류층 가족의 분위기를 생생히 묘사하고, 검소하고 투쟁적인 그의 삶을 다룰 뿐이다.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과 관련해 연구자들이 각각 어느 정도 기여했는가 하는 사실도 시종 차분한 어조로 쓰여져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DNA 구조발견의 공로가 왜 그렇게 논쟁에 휩싸였는지 간파하게 된다.

프란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함께 일한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연구소는 DNA 구조연구의 후발주자였다. 2차대전후 물자가 부족했던 영국에선 두 개의 대학이 같은 연구를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고 DNA 구조 연구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속한 킹스 칼리지 몫이었다.

하지만 프랭클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킹스 칼리지의 동료 모리스 윌킨스는 수시로 캐번디시연구소를 방문해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사진을 보여주고, 논문으로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제공했다. 더욱이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이 연구비 지원기관(의학연구위원회·MRC)에 비공개로 제출한 보고서를 은밀히 입수하기까지 했다.

1963년 크릭, 왓슨, 윌킨스는 사이좋게 노벨상을 나눠 가졌다. 프랭클린이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58년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탓도 있다.

물론 왓슨과 크릭에겐 창의적인 직관이 있었다. 그 직관을 자극한 실험데이터는 프랭클린의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에필로그에서 프랭클린의 삶이 사후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읽다 보면 "치사한 남자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지 모른다. 이미 거물이 된 왓슨은 스물 셋 청년의 눈으로 DNA 연구시절을 그린 책 '이중나선'을 68년 발간하면서 프랭클린을 "DNA의 사진을 잘 찍었지만 해석을 할 줄 몰랐고, 옷차림이 촌스러웠으며, 남자들을 못된 소년처럼 대하는 여성"으로 묘사했다. 이 일로 프랭클린의 가족은 큰 상처를 받았다.

'이중나선'은 지금도 추천 도서로 꼽히는 과학고전인 동시에 여성들을 자극, 페미니스트 과학사가를 탄생시킨 책이기도 하다.

프랭클린은 여자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던 시절 대학을 다녔고, 여교수에게 식당 출입을 제한하는 시절 대학에서 과학을 연구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당당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완벽주의자였다. 프랭클린 자신은 데이터를 도용당한 것보다 연구할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이제 그의 이름을 역사에 기록할 만큼 현대 여성의 삶은 바뀌었다. 혹 남자들의 정치놀음이 진저리 난다고 느끼는 여성이 있다면 이 책을 들고 공감에 빠져보자. 나도선 진우기 옮김.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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