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탐구> 발해사가 한국사인 이유

2006. 9. 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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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 '발해고'서 '남북국시대' 첫 설정

'삼국사기'와 일제 관변학자들 빌미 제공

"발해는 고구려 후계", 왕도 국서로 자임

무덤양식.온돌.쌀 등 한민족 특유의 문화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잠잠하던 중국의 '동북공정'이 수면 위로 떠올라 한국과 중국 사이에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邊疆史地) 연구센터가 웹사이트에 "발해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당나라의 통치범위 안에 든 지방민족정권이다"는 등의 논문을 다수 게재한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다.

중국은 고조선, 부여도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킨 가운데 자국의 역사적 지평을 한강 이북의 고구려까지 포함시키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이런 주장은 한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다.

이런 중국 주장의 이면에는 중국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중화사관(中華史觀)과 한반도 상황에 따른 중국 동북지역의 장래불안 등이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역사는 일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중국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사는 역사적ㆍ문화적ㆍ종족적 발자취로 볼 때 당연히 전통적 한국사의 영역에 포함된다.

한국 사학계는 그동안 발해사 부분에 소홀히해온 게 사실이다. 이는 발해의 정사가 없는 상황에서 '삼국사기' 등 일부 기록이 발해를 역사 영역에서 배제했던 게 큰 원인이 됐다. 물론 발해사를 엄연한 한국사로 보는 방증 자료도 적지 않다.

발해사가 한국사라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발해사가 한국사인 이유를 '한국 속의 세계'(창비)의 저자인 정수일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의 견해로 알아본다.

◇발해는 어떤 나라 = 발해는 698년에 건국해 926년에 멸망하기까지 무려 228년 간 15대를 이어간 중앙집권적 독립국가였다.

대외 정복활동으로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해 동북아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국토 면적은 한반도 전체의 2.2~2.8배에 달하는 50-63만㎢였다. 강역은 북으로 아무르 강에서 서로 랴오허 강, 남으로 대동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을 받아 역사를 마감한다.

중국의 당나라는 이런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국가로 인정했다. 고구려 후예가 세운 고구려의 당당한 계승국임에도 중국은 현재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었다고 폄하한다.

발해는 통일신라와 더불어 7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까지 한국사의 남북국 시대를 구가했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한 가운데 한민족의 역사주체로 친선과 교류, 경쟁과 대립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발해였지만 우리가 가장 잘 모르고 있는 한국사 부분이기도 하다. 통일신라보다 30년 정도 수명이 짧았으나 영토가 그 4~5배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발해 지식은 통일신라의 그것에 비해 너무 빈약하다.

◇발해에 관한 역사 기록 =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발해의 건국과정과 발전모습을 전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규원사화'는 발해 유민이 고려에서 썼다는 역사서 '진역유기'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들 책은 발해 관련 내용이 매우 간단해 아쉬움을 남긴다.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설정한 사람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었다. 그는 1784년에 쓴 '발해고' 서문에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이라고 서술했다. 이어 정약용이 저서 '아방강역고'와 '발해속고'에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로 소개했다.

발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것은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박은식은 '발해사'를 통해 민족의 정통과 정기를 지키려 했다. 장도빈의 '국사', 권덕규의 '조선유기'도 그 같은 지향과 기상을 보인 민족사학 저서였다.

◇논란을 제공한 빌미들 =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발해사를 스스로 무시하는 데 대해 "우리나라 선비들이 신라 9주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버리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통탄했다.

이는 발해를 도외시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관련이 있다. 신라중심주의에 빠진 삼국사기는 발해사를 아예 무시해버렸는데 이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불완전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 때문이었다.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발해사는 일제 관변 사학자들의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올가미에 걸려 만주사의 일부로 변조된다. 여기에 하야시 다이스케는 '조센시(朝鮮史)'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신라가 있어 다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있을 수 없다는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내놓아 발해사를 한국의 정통사에서 분리시켰다.

또 당나라에 유학한 일본 승려 스가하라 미치자네가 펴낸 '루이쥬고쿠시(類聚國史)'는 이렇다할 증거도 없이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 주민은 말갈인이라며 이른바 '이중종족론'을 폈다. 안타깝게도 이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물론 우리 학계의 일부조차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이는 발해가 파견한 외국 사절단에 말갈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유득공의 '발해고'의 견해와 배치된다.

◇자국사 주장하는 중국의 움직임 =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앞세워 중국이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해온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이후 정지작업을 꾸준히 해오던 중국은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발해 유적지에 철의 장막을 쳐놓고 외부인, 특히 한국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은 발해 유적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질 것으로 관련학자들은 전망한다. 이는 최근 드러나 백두산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추진과 2018년의 제25회 동계올림픽의 백두산 유치 움직임에 맞물려 주목되는 대목이다.

중국은 또 백두산 관광객들이 다니는 지린(吉林) 성 안투(安圖) 현에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대형 표지석을 세운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중국 역사서로는 '구당서' '신당서' 등이 발해를 언급한다. 이들 역사서는 발해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으나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는 주장을 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가 고구려를 온전히 계승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논리라면 고구려 역시 말갈인이 뒤섞여 살았으므로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으로 비약한다.

◇발해사가 한국사인 역사ㆍ문화적 이유 = 발해 건국의 역사적 뿌리는 고구려 부흥운동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끌어 모아 부흥운동에 앞장섰다.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대부분은 나중에 고려로 망명해 역사적 정통성을 고려에 넘겨주었다.

발해의 2대왕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며 고구려 후예임을 자임한다.

변방 소수민족인 말갈인이 세웠기 때문에 발해사는 중국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말갈인이란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쑹화강 유역의 속말 말갈이나 백두산 지역의 백산 말갈에서 보듯이 지역에 따라 그곳에 사는 일반인을 가리키는 중국의 비칭(卑稱)이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발해인의 생활문화였다. 중국의 '구당서'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같다"고 썼다.

어느 민족이나 보수성이 가장 강한 장례법과 무덤양식을 볼 때 고구려와 발해는 같다. 무덤양식의 경우 똑같이 돌방무덤을 사용했고, 한민족의 독특한 주거문화인 온돌도 두 나라가 공유했다. 발해가 당시까지만 해도 동이족 중 한민족의 전유물이었던 쌀 농사를 지었던 것도 우리 민족의 얼을 뒷받침한다.

◇과제

발해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에 중국 내부에서도 있었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조차 생전에 역대 중국의 대국적 배타주의를 사과하면서 발해가 한국의 옛 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중국의 장안에 버금가는 수도를 가진 대제국 발해는 완벽한 국가체제와 주권주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했다. 이런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오만에서 나온 역사의 변조일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발해가 고조선-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의 정통국가라는 내부 인식의 확산이 긴요하다. 이를 포기할 경우 민족사의 절반을 잃게 된다. '삼국사기'의 한계나 일제의 '만선사관' '지배 피지배층의 이중구조설'에 가로막혀 민족사의 강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연구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과제다. 우리가 피동적으로 고구려 역사문제에 끌려 다니는 사이에 중국은 발해사 조작을 거의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발해 전공자가 박사 과정까지 모두 합해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대응채비가 허술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중국과 대비된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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