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짧은 이별..가슴이 아려와

2006. 7. 1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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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출산과 육아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대안을 모색해 보는 '육아일기'. 이번에는 공부하면서 아이를 기르고 있는 곽송연(34) 씨가 육아의 어려움과 보람을 들려줍니다. 서강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곽 씨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전공하며 제노사이드와 인권에 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2004년 7월 태어난 아들 준하를 키우며 연구와 강의까지 1인 다역을 해내고 있는 곽 씨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준하가 어린이집에 가는 첫날, 난 울지 않았다. 아이가 불안해 할까봐 억지웃음을 지으며, 밝게 손을 흔들었다. 아직 젖도 떼지 못한 7개월 된 아기를 시설에 맡기면서 수많은 상념이 교차했지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차곡차곡 준비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우선 태어나서부터 모유 수유를 해 온 아이인지라 천천히 분유로 수유를 바꾸는 작업이 필요했다.

직장 보육시설의 개원 한 달 전부터 아이에게 맞는 분유와 수유용 인공 젖꼭지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과정을 밟았다. 비교적 수월하게 모유를 뗀 착한 준하는 모자란 수유량을 이유식으로 대체하는 듯 했다.

원래 모유 수유 아이는 모유 특성상 1회 수유량이 분유 먹는 아이에 비해 적다. 거기다 익숙하지 않은 인공 젖꼭지의 감촉 탓인지 준하는 그 월령 아이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의 수유량 밖에 채우지 못했다.

때문에 이유식 초기부터 먹성이 좋아 그 월령 아이들의 두 배 가까운 양을 순식간에 해치웠던 준하의 이유식 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에 온통 신경을 집중했던 나는 벌써부터 어린이집에서 배고파 울고 있지나 않을 지 노심초사였다. 또 천 기저귀에서 종이 기저귀로 바꾸면서 엄마는 편해졌지만, 부드러운 아이 피부에 기저귀 자국이 나 있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준하가 어린이 집에 가면서 새로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이집에 가면서 준하가 처음으로 머리 깎던 날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한 건 둘째 치고 별 필요가 없었던 유아용품을 재구매하면서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하루 10개 정도를 소비하는 기저귀 값, 분유 값에 여러 개의 젖병, 소독기 등 수유에 필요한 각종 물품, 또 밖에서 생활할 아이니 외출복과 내복도 여러 벌, 거기다 매달 지출해야하는 보육료까지 더하니 예상보다 꽤 큰 지출규모였다.

갑자기 순식간에 늘어나는 보육비용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커갈수록 아이 교구에 장난감, 그리고 교육비용까지 들어갈 텐데, 도대체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았다. 돈 없으면 아이도 못 낳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아이용품

처음 출산 준비물을 구입하면서 이미 느낀거지만, 우리 나라는 아이용품들의 가격이 너무 높게 책정돼 있다. 분유나 기저귀 값은 물론이고, 아이 옷의 가격은 어른 옷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그 외 유모차, 카시트 등 안전용품의 가격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이나 독일에서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과 가끔 육아에 관한 정보를 나누다 보니 보통 2배에서 심지어 그 이상의 가격차가 나는 용품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에 유난스레 집착하는 한국 부모들의 심리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는 상흔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물론 가격만큼 품질을 높이고 안전관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리 왈가왈부할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오히려 안전에 대해선 둔감한 듯하다. 얼마 전 아이들의 주식인 분유에서 이물질이 튀어 나오고, 기저귀와 물티슈에서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검출돼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났다.

또 유아용 매트에서 환경호르몬이 나오고, 이제 필수품이 된 국산 카시트의 성능비교 실험에서 대상이 된 카시트가 모조리 안전기준에 미달됐다는 뉴스도 들린다.

아이용품을 제조, 판매하는 기업의 도덕성도 의심스럽지만, 관리감독을 소홀히 하는 관계당국의 안일한 태도에 많은 엄마들이 울분을 터뜨려야 했다. 그러니 아는 게 병이라고 적어도 안전용품만은 그나마 수입품에 비해 가격이 낮은 국산품을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현지 가격에 비해 두세 배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수입품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 심정이다. 돈도 돈이지만, 아이를 낳아 안전하게 키우기엔 한국은 태어나자마자 위험스러운 환경이 너무 많다.

맘 놓고 사기 힘든 유아용품들

여하튼 이래저래 불편한 심경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어린이집에 아이를 출근시키고 나서도 걱정은 매일반이었다. 긴장과 어색함 속에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물리고, 다치는 아이 소식에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헐레벌떡 어린이집으로 뛰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또 생전 감기 한 번 앓지 않던 애가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판국이었다. 그럴 때마다 애써 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와 다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저 어린 것을 저리 고생시키니? 넌 참 몹쓸 엄마야" 라는 마음 속 울림에 아이 눈을 똑바로 보기가 못내 힘들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리 없이 그저 잘 버텨주기만 맘 속으로 빌고 또 비는 우격다짐이 전부였다.

나 역시 학교생활에 새로이 적응한다는 게 그리 만만치만은 않았다. 사람들도, 책도 모든 게 낯설었다. 아이를 낳고 근 1년 만에 다시 학교에 나온 나는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 몰라 중심을 잡지 못했고, 그런 나를 주변 사람들도 같이 어색해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은 사도사도 끝이 없었다. 살 때마다 준하에게 안전할 지를 따지다 보면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나마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구입해야 했다.

무엇보다 아이 엄마가 그렇게 빨리 애를 떼놓고 공부를 다시 재개한다는 사실에 너나 할 것 없이 놀라워했다. 첫 인사를 드리러 나타난 나에게 선생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애는 어떡하고?"하고 걱정스런 말투로 되물으셨다.

당신들 연배에 흔치 않은 일이니 아마도 적잖이 당황하셨을 게다. 이 모든 상황에 괜한 주눅이 들어 있었던 나는 농담 하나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만큼 많이 꼬여 있었다.

어느 날은 평소 너무 어려워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선생님 한 분이 나름대로 애쓰는 내게 우리 식(?)의 칭찬을 해주고 싶으셨던지 "너 학교 나와서 뭐하니? 집에 있기 싫어서 학교에서 음악 듣고 놀려고 나오는 거지?" 하셨다.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곧 샐쭉 토라져서 "저, 음악 싫어해요" 해버렸다. 속으로 '어떤 미친 엄마가 음악 듣고 싶어서 젖먹이 애 떼놓고, 학교에 놀러 나오나'하면서 분을 삭였다.

설마, 그 양반이 그걸 몰라서 그 말을 했을까마는 나는 내 복잡한 심경을 몰라주는 주변사람들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다. 선배나 후배들도 표현은 달랐지만, 너 나할 것 없이 정치학하는 인간들의 괴상한 방식의 위로를 심심찮게 흘렸다.

육아에 관한한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다짐을 반복하면서 나는 그렇게 버티고, 또 버텼다.

애는 어떻하고 나왔니?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은 분유와 기저귀가 전부가 아니다. 아이가 쓰는 물품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을 아이에게 맞춰 바꿔야만 했다.

차츰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출산 전 미뤄뒀던 논문의 예비조사 날짜가 잡혔다. 3주간의 베트남 답사 일정이었다. 본격적인 실사에 앞서 미리 잡은 예비조사인지라 금전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기관도 없이 모든 것을 혼자서 준비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내 논문 주제가 '학살'인지라 베트남이건 한국이건 방해나 안하면 다행인 판국이었다. 소위 가해자의 입장인 한국에서도 논란이 많은 주제일뿐더러 베트남 역시 국가 차원에서 그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공식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도움을 바란다면, 가난한 한국 민간단체에 베트남 현지에서 필요한 행정상의 지원이나 기대해 볼 수 있을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결국은 그나마도 올 제로인 상황에서 현지 통역, 피해자 면담 허가 등 모든 걸 혼자서 막무가내로 밀어부쳐 출발을 강행했다.

경황 중에 '견 선생'(?)도 피해간다는 오뉴월 독감에 걸려 몸마저도 성치 않았다. 공항에 따라 나온 준하와 아이 아빠에게서 무슨 정신으로 돌아섰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준하도 엄마도 어린이집에 안정적으로 적응하기 시작했지만, 준하는 여전히 젖병도 못 뗀 돌도 안 지난 어린 것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긴 이별을 한 우리 모자는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마주보며 손을 흔들었다.

베트남에서의 3주간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다. 식탁 위에 고이 모셔두고 온 감기약 대신 현지에서 구입한 독한 약에 내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날씨마저 우기철로 갑작스레 쏟아지는 스콜에 온 몸을 적셔 기침이 잦아들 줄 몰랐다.

밤마다 준하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길거리를 거닐다가도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서성였다. 아이 아빠랑 주고받은 메일에 헤어진 첫 날, 욕실에서 걸레를 빠는 준하 친할머니를 보고 준하가 '엄마'하고 불렀다가 슬픈 듯 돌아섰다는 구절이 내내 가슴에 박혔다.

냉정한 연구자에게 엄마의 마음이 스며들다

하노이에서 발급이 계속 지연되는 허가서를 기다리면서 흐엉사원에 들렸다. 현지에서 도움을 준 지인의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는 소개에 나의 어쩔 수 없는 미신 소녀 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세 가지 소원을 빌었다.

신랑과 준하가 건강하고 유쾌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 그리고 내가 현지 일정을 꼭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원의 영험함이 발동한 것일까? 웬일인지 그 때부터 일이 술술 풀려가기 시작했다. 속 썩이는 통역에, 관료주의가 몸에 밴 현지의 공무처리 방식에 독이 잔뜩 올랐지만, 그보다 더 큰 마음으로 물심양면 도움을 준 현지인들 덕택에 나 조차도 놀라울 정도의 수확을 얻고 돌아왔다.

지나 놓고 봐도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베트남의 고도 후에는 통일 이전 국경을 접한 최고의 접전지라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그 당시의 DMZ을 답사하러 갔다가 거기서 한 소년을 만났다.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상처투성이에 마른 몸이었다. 그 친구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No"라고 말해버렸다. 지저분하고, 어딘지 아파 보이는 그 애한테 병이라도 옮아 우리 아기한테 해를 끼칠까 두려웠다.

쓸쓸히 돌아서는 그 애의 뒷모습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인지 피해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갓난아이가 죽임을 당했다는 대목에서 나는 이성을 잃고 눈물을 보였다. 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준하와 내가 외면했던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전 근무했던 모 학살연구관련 기관에서 피해자 증언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울음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

엄마가 베트남에 간 사이 할머니가 얼마나 업어줬던지 준하가 포대기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나는 물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동료들은 나를 괴물 취급을 했다. 나로선 냉정해야할 조사관이 감정에 치우치는 게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은 일이니까. 베트남에서의 나는 인터뷰어라기 보단 잠시 난 애 엄마였던 듯하다.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직행한 곳이 병원이었다. 위험지역을 여행하고 온 터라 혹시나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단속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별 이상이 없었지만, 준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먼 곳으로의 출발 전 엄마 껌딱지였던 준하는 이제 아빠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고 엄마랑만 남는 걸 두려워했다. 셋이 있다 아빠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내가 아무리 붙들어도 아빠를 부르며 목 놓아 울어버렸다. 헤어져 있을 때 보다 그런 아이를 보는 것이 더 가슴이 아려왔다.

3주간의 이별이 아이에겐 3년간의 정서적 벽을 만든 것이다. 또 다시 셋이 함께하는 생활로 돌아왔지만, 아직은 온전한 셋이 되지 못한 시간이 어찌어찌 흘러갔다.

나는 여독에 오랜 시간 방치한 독감 때문에 계속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했고, 목전에 다다른 준하 돌치레에,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는 우리 부부는 양가 직계가족들만 불러 모아 조용히 식사하고, 스튜디오에서 돌 사진을 찍는 것으로 돌잔치를 대신했다.

사실, 2주 남짓 남은 시험 때문에 요사이 풍속도로 자리 잡은 이벤트로 넘쳐나는 돌잔치를 준비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아침부터 한 밤중까지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하느라 준하는 엄마랑 마주할 시간을 또 한번 저당잡혀야 했다.

녹초가 되다시피 한 몸을 이끌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 집에 오면 거실과 부엌은 준하와 아빠의 사투의 증거물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고, 빨랫감과 음식찌꺼기 틈에서 부자는 단잠을 자고 있었다. 당장 해야만 하는 소위 집안 일이 산더미였다. 설거지에, 다음 날 먹을 음식준비, 빨래, 청소를 다하고 나면 새벽 3시가 훌쩍 넘었다. 힘들었다.

"새벽 3시가 훌쩍 넘었다. 힘들었다"

출산과 육아로 집으로 돌아간 엄마들이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재취업에 성공해도 아이를 맡기는 비용과 그에 따른 각종 지출로 버는 거나, 안 버는 거나 매 한가지의 상황인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는 데서 오는 죄책감과 불안감, 그리고 똑같이 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해도 여전히 내 몫으로 남겨진 집안 일에 육아, 또 애 엄마라는 사실이 직장에서 배려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프로의식이 없다는 백안시의 분위기까지. 결국은 패장의 찢겨진 상처를 안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 한 눈에 보였다.

한국에서 아이 엄마에게 지워지는 삶의 무게감은 그들이 노여워하기에 지나치리만큼 충분한 것이다. 나는 이제쯤이면 사회나 가정이 그 짐을 나눠 갖기 바란다. 행복한 엄마와 그 아이들이 만드는 살만한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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