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재야사학자 이종기와 한일고대사

2006. 6. 3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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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한민국의 70-80년대는 민족 열풍의 시대였다. 아울러 그에 편승한 '국사'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대 통치권자들이나, 이들을 군사독재자로 규정하고 맹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한 이른바 민주화 운동세력에게나 제1 화두는 모두 민족이었다.

교과과정과 각종 국가고시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이 됐고, 그에 덩달아 거의 모든 대학에 국사 관련 학과가 생겨났으며, 당시 국사학 전공자들은 그야말로 석사학위 논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대학 교수로 진출했다.

민족의 열풍과 그와 궤를 같이 한 국사교육의 강화는 재야사학 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재야사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냉소적이었던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재야를 가리켜 국사를 망치는 주범처럼 비판하거나 아예 무시하고자 했지만, 양측은 서로 대립하는 듯하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유례없는 국사의 호황기를 만들어냈다.

이 시대 재야사학의 한 축을 담당한 이로 아동문학가였던 고 이종기(1929-95)가 있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70년대 이후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한일고대사 연구에 천착하게 된다. 그의 이런 역정은 76년 일본 후타미쇼보(二見書房) 출판사에서 나온 일어본 '히미코 도래의 수수께끼'와 이듬해 한국의 일지사에서 '가락국 탐사'로 정리됐다. 타계 이후인 97년에는 유고집을 모아 '춤추는 신녀'가 출간된다.

타계 10주기를 즈음해 최근 그의 딸과 삼국유사 연구자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이도흠 교수에 의해 선보인 또 하나의 유고집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책장) 또한 제목이 암시하듯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매달린 한일고대사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이다.

이번 유고집을 포함한 그의 글에서 표출된 생각은 요약하면 이렇다. 중국기록에 고대 일본열도를 통치한 여왕으로 보이는 히미코(卑彌呼)는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난 딸로서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규슈로 건너가 남동생 선경왕자와 또 다른 가락국을 세우니 그것이 야마다이국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허황후는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였으며, 서기 48년 여름에 두 달 가량 되는 항해 끝에 낙동강 어귀에 닻을 내리고 김수로를 만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들을 뒷받침하고자 이종기는 김해 수로왕릉 사당을 장식한 쌍어문(雙魚文)이 일본 규슈의 신사와 중국 푸저우의 사찰은 물론이고 인도 북동부 아요디아 사원에서도 발견된다든가, 파형동기(巴形銅器)나 다른 신어문(神魚文)도 이들 지역에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든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 기록을 토대로 하고 일본서기와 중국기록 등의 문헌기록을 가미한 이런 작업들을 통해 이종기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수로왕비 허황후와 그의 딸 히미코는 더 이상 전설 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재했고, 그들이 건너간 미지의 뱃길 또한 아시아 사람들이 서로의 지혜를 배우고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정기적으로 오가던 해상 무역로이자 문화교류의 길이었다. 따라서 그 길은 사라진 고대 한국사를 복원하는 길이자 우리 민족정신을 살리는 길이요,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는 길로 열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히미코가 허황후의 딸이기에 히미코의 흔적이 서린 규슈 일대를 탐사하는 일이란 "내게는 같은 진외가(眞外家) 어른들을 뵈러 간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까지 말한다. 2천년 전 우리 조상이 건너가 일본을 개척했기에 그 땅은 우리에게는 외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강단사학계는 학술적 뒷받침이 전혀 없는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일축하거나 아예 무시로 일관했으며, 그런 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종기가 일본에 대한 한민족의 우월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에 심취하던 그 시절, 강단사학 중심에 위치한 이기백(1924-2004) 당시 서강대 교수는 이런 주장을 내놓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는 준 것만 있지, 받은 것은 하나도 없다." 303쪽. 1만2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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