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상황, 그 순간이 중요할 뿐"







[인터뷰] 사진·신문과 함께 한 반세기, 정범태 전 기자
[미디어오늘 이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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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정적 순간> 서울 경기고등군법재판소, 1961년(출처: 정범태 사진집, 정범태 지음, 눈빛 펴냄) | ||
지난 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는 한 여죄수의 재판이 열렸다. 삼엄한 분위기에 짓눌린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죄수. 여죄수 옆에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휴머니즘이라는 말로 모자랄 이 '결정적 순간'은 정범태(78) 전 기자가 잡지 못했다면 그저 한 '순간'으로 휘발되고 말았을 것이다.
'결정적 순간'과 '말과 마부' 등으로 이름을 알린 다큐멘터리 사진가 겸 사진기자인 정범태씨가 사진집 '정범태 사진집-카메라와 한 반세기 1950년-2000년'과 '정범태, 사진 인생 50년전'(김영섭 사진화랑·4월27일까지)을 통해 카메라 인생 50년을 정리하고 있다. 일간지 사진 기자로 40여년간 현장을 누볐던 정 전 기자는 낮잠 자는 일꾼, 물지게를 짊어진 소녀 등 50∼70년대 민중들의 삶과 고대 앞 피습사건, 서울역 압사사건 등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다.
신문과 사진과 함께 한 40년 7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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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범태 전 기자 | ||
정 전 기자는 찍고 싶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 기자가 됐다고 했다. 6·25 당시 군속으로 공병대에서 사진을 찍었던 정 전 기자는 지뢰 매설과 교량 폭파 사진만 찍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번은 중공군과 한국군이 죽은 걸 찍었더니 상사인 미군이 이것은 저널리스트가 찍을 사진이라면서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더라." 좋은 현장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정 전 기자는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결심으로 1955년 10월 조선일보 사진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 후 정 전 기자는 4·18 고대생 피습사건, 서울역 귀성객 압사사고 같은 굵직한 특종도 여러 건 터뜨렸고, 1962년 사진설명 필화사건(반공법 위반 등)으로 1년 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를 번갈아 두 번씩 근무했는데, 이유는 사진부장을 하기 싫어서였다. "사진부장이 하기 싫었어. 기자가 아니고 의미가 없어. 교통정리하는 것 다 부질없는 짓이지. 사진부장은 오래할 것이 못 돼." 1986년 나이의 힘을 이기지 못해 퇴직하게 된 정 전 기자는 곧바로 세계일보에서 계약직 사진기자로 일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가 58세였고, 그는 69세인 97년까지 현장을 뛰었다. "셔터를 누를 힘이 있는 한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을 증명하듯, 그는 안중근 의사 순국현장인 여순감옥 등을 찍어 정년 이후에만 두 차례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역사를 바꾼, 목숨을 바꿀 뻔한 '결정적 순간'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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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천일백화점 앞, 1960.4.18 (출처: 정범태 사진집, 정범태 지음, 눈빛 펴냄) | ||
1960년 4월18일 고대 앞 피습현장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보도사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날'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대학생들을 아침부터 좇았던 정 전 기자는 이날 밤 9시30분 경 청계천과 종로4가 사이에 있는 천일백화점 앞에서 대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얻어맞으며 쓰러져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가슴이 떨려 셔터를 제대로 누를 수조차 없었다. 분노와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지만 사진기자라는 사명감으로 '이 시대를 살면서 저것을 기록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죽으나 사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딱 한 번 플래시를 터뜨렸다." 미리 빠져나갈 골목을 봐뒀던 정 전 기자는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진 기자는 반신불수가 되도록 얻어맞아야 했다. 다음 날 그의 사진은 조선일보 사회면 사이드로 실렸으나 4·19의 촉매제가 되기 충분했다.
딱 한번 터진 플래시의 위력을 절감한 경찰은 4월19일 청와대 앞 대학생 시위를 취재하던 정 전 기자에게 총을 겨눴다. 4·18 고대 피습 사건을 보도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것이다. 경찰이 쏜 총은 다행스럽게도 그의 웃옷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보도차량을 몬 운전사는 세상을 떴다고 했다.
"독자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좋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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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남대문 시장, 1956 (출처: 정범태 사진집, 정범태 지음, 눈빛 펴냄) | ||
산전수전을 겪으며 반세기를 기록해온 정 전 기자가 생각하는 좋은 신문 사진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100% 객관적인 사진이다. 그리고 사람냄새가 나야한다. 정 전 기자는 그런 사진을 찍기 위해 현장을 빨리 읽고, 한 군데서 두 장 이상 찍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했다. "순간, 순간이 변하기 때문에 처음 느꼈던 생생함을 독자에게 바로 전달해야한다." 조작이나 연출을 해선 안 된다는 말도 이어졌다. 관례라는 이름으로 정치인들에게 악수를 요구해 찍은 사진은 '꾸민 사진'이자 '죽은 사진'이라는 것이다. 사진 기사를 홀대하는 분위기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사진이 (글로 된) 기사와 중복되면 절대 안 된다. 편집자들은 '유족들이 오열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으면서 오열하는 유족 사진을 실으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중복이다. 사진은 자체가 기사이므로 독립성이 있어야한다. 나는 이것을 갖고 40년 동안 계속 싸워왔다."
"그때, 그 상황, 그 순간이 중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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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염천교, 1956 (출처: 정범태 사진집, 정범태 지음, 눈빛 펴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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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뚝섬, 1956 (출처: 정범태 사진집, 정범태 지음, 눈빛 펴냄) | ||
정 전 기자에게는 역사의 기록자라는 평이 따라오지만 정작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역사의 기록도 두 가지다. 어떤 때는 정의를 정의로 볼 수도 있으나 불의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기록인가? 그 때, 그 상황, 그 순간이 중요하다. 현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후 역사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찍은 사진이 역사를 흔들어 놓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젊은이들이 쓰러지는데 사진기자가 현장을 회피할 수 없지 않나. 봉변을 당하더라도 기자이기 때문에 찍어야한다. 전쟁사진을 찍어온 로버트 카파가 자신의 현장인 전쟁터에서 죽었고, 체 게바라는 장관직을 두고 혁명가로 나서다가 죽었다. 그게 사진기자의 숙명이다."
멈추지 않는 셔터, 우리의 소리와 춤을 담는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취재하러 갔을 때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프레스카드도 없어 천안문에 가지 못한 것이 지금도 억울하다는 정 전 기자가 찍고 싶은 사진은 전쟁사진이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선 안되겠지만"이라는 역설적인 단서가 달려있다. 허균·허난설헌·황진이·이매창·정약용의 삶과 정신세계를 피처스토리로 담아보고 싶기도 하다.
기자 시절, 신문사용 카메라와 리얼리즘 사진을 찍기 위한 카메라, 모두 2대의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는 정 전 기자는 이제 한 대의 카메라만 갖고 다니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다. 1950년대부터 한국의 춤과 소리를 사진으로 담아오며 '춤과 그 사람'(전10권),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전통예인 100사람'을 등의 사진집을 낸 정 전 기자는 국악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기도 한데, 지금 KBS 1FM 국악프로그램 <흥겨운 한마당>에서는 사진으로 볼 수 없었던 우리 소리와 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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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과 마부>, 서울 중구 만리동 1956 (출처: 정범태 사진집, 정범태 지음, 눈빛 펴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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