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76년생+안경+O형+샐러리맨=그룹 ''안경은 오형''

2006. 3. 2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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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은 오형'이라는 음악 그룹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이 그룹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다. 앨범을 내기는 했으되 정식 유통망을 거친 적도 없고, 대중매체에 출연한 적도 없는 아마추어 그룹이니 모르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일부 인터넷 음악 사이트에서만 이들의 음악을 접할 수 있다. 우연히 이들의 음악을 들었다는 한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에 "꼭 밴드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또 노력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전형적인 아마추어 노래 같으면서도 듣기 편하다"고 이들의 노래를 평했다.

나종서, 배성균, 정규원, 지충환. 이들 네 사람은 1976년생 동갑내기 중·고 동창생들로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 모였고, 일상의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안경은 오형'을 결성해 음악을 시작했다.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이들은 2004년 11월 1집을 냈고 지금 2집을 준비 중이다.

네 사람 모두 개성 있는 생김새인데 꼭 한 군데 닮은 데가 있다. 안경을 썼다는 점이다. 안경은 오형이라는 그룹의 이름이 말해주듯, 네 사람 모두 안경을 썼고 혈액형도 오형이다. '안경의 오형' '안경이 오형' 등등 자신들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생각하다 가장 자연스럽게 들리는 '안경은 오형'을 그룹 이름으로 정했다.

"대학교 때 올림픽아파트 발전위원회(ODC)라는 모임을 만든 적이 있어요. 올림픽아파트에 살던 동네 친구들이 모여 만든 거죠. 처음에는 청소도 하고 축구도 하는 그런 모임으로 장난 삼아 만들었는데, 음악 하는 형이 있어 음악을 시작했죠. 우리가 그때 언더그라운드 그룹으로는 꽤 유명했다니까요. 컴퓨터 통신에 노래를 올렸는데, 조피디가 1∼2위면 우리가 3∼4위는 했어요." 정씨가 음악을 하기 시작한 연유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군대 가고, 취직하고, 유학을 떠나면서 각자의 일상에 쫓겨 살았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퇴근길에 명동의 골뱅이 집에서 다시 모인 네 사람은 옛 추억을 떠올렸다. 정씨는 "당시 우리가 같이하면 뭔가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틀에 박힌 일상이 싫었다"고 말했다. 배성균씨는 "우리 모임은 규칙 없고 엉뚱하고 틀에 박히지 않아 재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1집에 실린 노래에는 자신들의 생활과 느낌을 그대로 담았다. "2004년 10월 퇴근길 지친 몸 들어선 골목길,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의문 하나, 난 뭐 하나 뭘 하며 살고 있나, 하루하루 완전히 똑같이 마치 거울같이, 만원 전철의 출근길, 회사에선 하루 종일 이 눈치 저 눈치, 서러움에 풀어헤친 넥타이, …이것이 나의 인생이라니….' '어느 샐러리맨의 비애'라는 노랫말의 일부다.

지충환씨는 "우리 세대는 지금 직장을 선택하고 같이 살 사람을 정해야 하는 복잡하고 불안한 시기"라며 "불안정함과 무료함이 우리를 뭉치게 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나씨는 "2∼3년 전만 해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패도 하고 연애 상처도 받으면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고 말을 이었다. 앨범에 실린 '민경'이라는 곡은 나씨가 옛 여자친구에게 들려주는 노래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굉장히 여우더라"는 나씨는 "결과가 안 좋았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쉽지만은 않은 인생이지만 이들 네 사람은 함께 노래하면서 서로 삶을 공유하고 위로받고, 또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사는 게 똑같잖아요. 예전에는 다들 자유롭게 살 줄 알았거든요. 막상 직장 생활을 하니까 직장 생활 그 자체를 위해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톱니바퀴 부품처럼 사는 것 같아서요." 정씨는 직장 생활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주위 사람들이 앨범 냈다는 얘기를 들으면 자극받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하더라"고 말을 이었다.

네 사람의 음악적 감각이 탁월한 건 아니다. 배씨는 "처음 앨범을 내자고 했을 때 우리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뭔가 하고 싶었던 이들은 일단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부족한 부분은 음악 일을 전문으로 하는 후배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이 1집으로 찍어낸 앨범은 모두 1000장. 그 중에 400장 정도는 지인들에게 팔았고 반 이상이 아직 남아 있다. 프로라면 빚만 잔뜩 짊어질 상황이지만, 편곡에 스튜디오 녹음까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을 후배 덕에 큰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앨범을 내면 후배에게 편곡비와 스튜디오 작업실 사용료로 2000만원을 주겠다고 했지만 술 한 번 사는 걸로 때웠고, 앨범 표지 사진 역시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공짜로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2집을 준비 중인 이들은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각오다. 정식으로 앨범 시장에 유통도 시켜보고 기회가 된다면 공연도 해 볼 생각이다. 그렇다고 소위 대박을 바라고 앨범을 만드는 건 아니다. 돈을 번다기보다는 좋아서 하는 일이다. 물론 그러다 돈이 잘 벌리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이들은 직장 부적응자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 뒤처지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모여서 음악을 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창조적 작업이야말로 인생을 가치있고 흥미롭게 만들어 준다는 네 사람. 앨범과는 별도로 '안경은 오형' 브랜드로 의상도 만들어 팔아볼 생각이다. 회사에서 디자인 업무를 하는 배성균씨의 솜씨를 십분 활용하는 아이디어다. 유통업계에서 일하는 지충환씨가 마케팅을 담당하고 정씨는 사업의 전체적인 틀을 구상한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마음가짐만은 "취미 이상"이라고 정씨는 말한다.

'안경은 오형'은 음악 그룹이지만 꼭 음악이 이들의 전부는 아니다. 네 사람에게 '안경은 오형'은 가족과 같은 하나의 공동체 성격이 더 강하다. 정씨는 동료들에 대해 "뭐가 좋아서 만나느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는데, 이제는 어쩔수없이 항상 같이 있게 되고 절대적으로 믿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음악의 완성도를 물었다. 이들의 음악은 한때 인터넷 음악 사이트에서 신인 음반 중 베스트 10에 든 적도 있다고 한다. 정씨는 "처음 음악이 나왔을 때 좋다고들 난리였다"며 "종서의 목소리가 매혹적이라는 얘기도 들었다"고 자신들의 노래를 예찬해 마지 않았다. 하지만 나씨는 "사실 굉장히 욕도 많이 먹었다"며 "너무 아마추어 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며 정씨의 자화자찬을 추스른다. 아마추어인 이상 아마추어같이 느껴지는 게 더 당연한 건 아닐까. 마음만은 프로라는 이들은 모임이 계속되는 한 3집, 4집 계속해서 앨범을 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인생은 어차피 완성을 향한 미완성 교향곡이 아닌가. 글 엄형준, 사진 이종덕 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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