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는 잊고 국회의사당을 기억하라

2006. 3. 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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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은미 기자]

ⓒ2006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해주겠노라던 큰 소리 브러더스 <매트릭스>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건 맞지만 남의 차 타고 돌아왔다. 각본 쓰고 제작만 했지 감독은 안 했다. 감독은 <매트릭스> 때 조감독을 했던 제임스 맥티그다.

때는 2040년.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몰락했고, 정부가 하는 말이 곧 진리이자 생명이며 방송은 정부 공식 앵무새 노릇을 하는 나라 영국이 무대. 정부 수뇌인 의회 의장이 곧 정부이며, 의장님과 정치적 성향은 기본이고 성적 취향이나 아무 거라도 다른 게 있으면 '정신집중캠프'로 끌려가 죽거나 집중 교육을 받게 되는 세상에서 이비(나탈리 포트만)가 TV를 켜놓고 꽃단장을 하고 있다.

통금을 알리는 소리가 거리마다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골목길로 살짝 빠져나가려던 이비는 이상한 남자들을 만난다. 이들은 실실 쪼개며 이비를 농락하려들다 이비가 반항하자 말한다. "내가 핑거맨이야."(바바리맨이 아니고?) 핑거맨이란 바로 우리나라 과거 역사로 치면 정보부나 국정원 인물로 막강 권력을 휘두르는 인사란 말씀.

요상하게 손가락을 놀리며 이비를 강간하려던 이들 앞에 갑자기 요상한 인간 하나가 나타난다. 히죽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모양부터 싸가지 없고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데다, 체신 머리 없이 꼬부라지는 콧수염 달린 하얀색 가면으로도 모자라 '나 가발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클레오파트라 풍 단발머리에 검정 모자를 뒤집어쓴 이 인간 왈, 너네 딱 걸렸어.

이름 하여 '브이'(휴고 위빙)라는 이 치는 날렵한 칼질로 핑거맨이 아닌 '핑구' 같은 이들을 싸그리 물리치더니, 'Z'가 아니라 'V'를 담벼락에 칼질로 새기곤, 고마워하는 이비를 데리고 웬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요상한 연설을 늘어놓아 어리둥절한 이비 앞에 교향곡이 울려 퍼지고, 교향곡을 배경음악 삼아 형사재판소 건물이 폭발한다.

펑 펑. 그 위로 휘황찬란 불꽃놀이까지 벌어지고, 브이 말씀하시길, 그가 쓴 가면은 단지 테러리스트의 신분 위장용이 아니라, 옛날 옛날 한 옛날인 1605년 영국에서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실패해 교수형 당한 인물 가이 포크스를 기리는 거라나?

브이는 방송에까지 나가 과거의 영웅인 가이 포크스가 미처 못 다한 일을 하겠노라, 1년 뒤인 11월 5일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겠노라 호언장담 하고 사라진다. 국민들에게 그날 국회의사당 앞으로 결집하란 폭탄 같은 메시지를 남기고.

히틀러처럼 생긴 의장은 길길이 날뛰며 이 사건을 정부가 낡은 건물을 폭파시킨 걸로 TV에 발표하게 한 뒤 범인 색출 작업에 들어간다. 핀치 수사관(스티븐 레아)은 수사하면 할 수록 이 사건이 요상하다. '브이'가 그냥 나라를 위해 나선 '쾌걸 조로' 같은 인물이라기보다 뭔가 얽혀진 비밀이 있음을 감지한 것.

브이와 같이 있던 장면이 감시 카메라에 찍힌 바람에 이비도 덩달아 쫓기고, 이 '브이'인지 뭔지는 잡히지 않고 정부측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하나 둘 브이한테 죽음을 당한다. 동생은 바이러스로 죽고, 부모는 잡혀가서 죽고, 자신도 수년간 정신 교육을 받았던 암울한 과거를 지닌 이비는 이제 어떡한다?

ⓒ2006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겠다"...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은 일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는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가 만든 그래픽 소설, 그러니까 만화가 원작이다. 이 만화는 영국의 만화잡지 <워리어>에 1981년부터 연재하다 1984년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사라졌다가 1988년 DC코믹스로 완간했다.

원래 흑백이던 만화는 1990년 컬러로 바뀌어 출간됐다. 만화가 출간 되던 때는 대처 총리가 영국을 통치하던 극우 보수 정부 시절이다. 결국 만화는 그냥 만화가 아니라, 그때 정부의 행태에 대한 처절하고 신랄한 비판이었던 셈. 이 만화의 팬이었던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 만화 각본 작업에 골몰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한 일이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영화로 만들어진 거랄까.

<매트릭스>가 완벽한 '환상'의 세계라면, <브이 포 벤데타>는 좀 더 현실적인 세계다. 원작 만화 덕분인지 영화는 정부와 미디어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요. 반대로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정부가) 공포를 통치 수단으로 삼았죠." 내뱉는 말마다 브이나 다른 인물은 신랄한 정치 평론가나 미디어 평론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더구나 썩어빠진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겠단 브이의 신념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다. 국회의원들이 떼거지로 이상한 짓과 이상한 소릴 하는 걸로 도배하는 최근 우리나라를 생각한다면?

'피의 복수'를 뜻하는 '벤데타'라는 말 대로, 브이가 칼을 던질 때마다 피가 솟구치는 바람에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이 아니구나 하는 걸 실감나게 하는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2시간을 조금 넘긴 2시간 12분이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예술가는 거짓으로 진실을 전한다"는 말처럼 시나리오를 쓴 워쇼스키 형제 혹은 맥티그 감독은 '가상현실'이란 거짓과 '영화'란 거짓으로 진실을 전달하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진실이 뭐냐면? 일단 속지 말란 거 아닐까?

어쨌든 <매트릭스>만큼 쇼킹하거나 신기하거나 혼을 쏙 빼놓지는 못했다. 까딱하다간 혼이 수면계를 헤매는 수가 있다. 브이로 나온 미스터 스미스(매트릭스) 또는 요정계 왕(반지의 제왕)인 휴고 위빙의 목소리가 너무 리드미컬해서일 수도 있지만. 브이는 당최 가면 언제 벗을까나, 휴고 위빙의 눈과 눈 사이에 광야가 흐르는 그 독특한 얼굴은 언제 나올까, 목 늘이고 기다리다간 실망하는 수가 있다. 이것도 스포일러라 할지 모르겠지만, 가면 절대 안 벗는다. 안타깝게도.

ⓒ2006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조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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