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마르크의 벌레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2006. 1. 2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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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10년 넘게, 유럽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된 2002년까지, 독일 지폐에 들어간 인물은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1:1이었다. 여성 인물 지폐 중 가장 고액권인 500마르크는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과 그녀가 그린 벌레와 푸성귀로 장식됐다.

1647년 출생이니 이른바 30년 전쟁의 막바지, 연이은 흉년에 기아에 흑사병까지 겹쳐 1700만 인구 중 800만명이 죽어나가던 독일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그래도 구텐베르크의 후예들은 동판으로 그림도 찍고 책도 찍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런 일을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재혼한 어머니의 새 남편은 의붓딸의 눈썰미와 솜씨를 크게 격려하며 그림을 가르쳤고, 곤충과 식물 연구가인 할아버지는 손녀딸에게 소소한 생명들에 대한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누구보다 일찍 재능을 꽃피워 스물여덟에는 제 이름으로 <꽃 그림책>을 출간하고, 4년 뒤에는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신과 그 특별한 밥상>이란 책도 펴냈다.

스무 살에 의붓아버지의 제자와 결혼하고 딸 둘을 낳지만,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녀 앞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던 남자와 곧 헤어졌고,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그녀는 몹시 경건해졌다. "시집가기 싫어 수녀원에 갔다"는 흔한 증언처럼, 그녀가 속한 신앙공동체에도 좀 자유롭고 싶었던 페미니스트들이 몰려와 학문과 예술을 논하며 정신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곳에서 번데기 시절을 보낸 그녀는 더 개방적인 도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비슷한 관심을 갖는 친구들을 만나고, 쉰이 넘은 나이에 지천명, 드디어 하늘의 뜻을 알아채고 날개를 펼친다.

그녀가 꿈꾼 곳은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풍요롭고 신비한 자연의 세계, 아마존 유역 수리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당시 아프리카에서 30만 명의 노예를 잡아다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죄악의 땅. 그곳에 당도했을 때, 말라리아뿐 아니라 돈벌이에 혈안이 된 농장주들도 그녀가 넘어야 할 벽이었다. 갈등 속에서도 메리안은 새벽 일찍 일어나 딸과 함께 열대림을 누비며 곤충을 채집해, 표본을 만들고 기록을 남겼다. 1년 반 넘게 수집한 자료를 갖고 2개월 항해 끝에 무사히 돌아온 그녀가 내놓은 갖가지 표본과 양피지에 그린 아름다운 수채화, 그 보물 앞에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환호했고, 몇 년의 작업 끝에 출간한 <수리남 곤충의 변태>는 "벌레는 악마의 소산"인 줄 알았던 미개한 유럽인들의 편견을 씻어냈고, 각국의 생물학자와 그림 수집가들을 열광시켰다.

서양 할머니들 외롭게 사는 집에는 꽃 핀 오이와 민들레, 나비와 애벌레 등을 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 비슷한 세밀화들이 몇 점씩 눈에 띈다. 우리 어머니들이 혼수 준비하며 조각이불보에 그런 무늬를 수놓았던 데 견줘, 20세기 초반까지 서양의 규수들은 메리안 화풍을 따라 벌레나 식물의 단편을 그리는 자연화가 유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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