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전설들] <4> '애국심과 바꾼 100승' 밥 펠러

[마이데일리 = 김형준 기자] 메이저리그의 강속구 투수 계보는 '공이 들어올 때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는 '빅 트레인' 월터 존슨(1907~1927 활약)부터 시작된다.
그 뒤를 이은 주인공이 1940년대를 초토화한 밥 펠러(1918~)다. 펠러의 피칭 화면을 분석하면 '평균 98마일'이라는 무시무시한 구속이 나온다.
39세의 존슨과 17세의 펠러를 모두를 상대해 본 명예의전당 2루수 찰리 게링거(디트로이트)는 '존슨이 더 빨랐다'는 증언을 남겼지만, 게링거가 메이저리그에 올라와 처음 상대한 투수가 존슨이었기에 객관성은 떨어진다.
펠러는 1936년부터 1956년까지 18시즌간 오직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만 활약하며 266승162패 방어율 3.25, 탈삼진 2581개의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최고의 전성기였던 23세부터 26세까지의 4년이 빠진 기록으로, 4년간의 공백이 아니었다면 100승-1000삼진이 추가된 360승-3600삼진도 가능할 수 있었다.
펠러는 최고의 전성기였던 1938년부터 1951년까지의 풀타임 10시즌간 6번의 다승 1위(5시즌 연속)와와 20승, 7번의 탈삼진 1위(7시즌 연속)와 5번의 이닝 1위(5시즌 연속)를 차지했으며, 방어율 5위 이내에도 6차례(1위는 1번) 이름을 올렸다.
그는 자신의 시즌이 만족스럽지 않았을 경우 먼저 구단을 찾아가 연봉삭감을 주장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으며, 4시즌의 공백 역시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17세 괴물 소년의 등장
아이오와주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펠러는 걸음마를 떼자마자 공을 잡았다. 열성적인 야구 팬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농장 한 쪽에 펠러를 위한 마운드를 만들어줬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1936년 17세의 펠러와 계약을 맺었다. 펠러가 계약금으로 받은 것은 1달러와 스카우트의 사인볼이었다.
스프링캠프캠프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3이닝 8K'를 기록하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던 펠러는 8월24일 메이저리그 첫 선발등판에서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현 볼티모어)를 상대로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5번째 선발등판에서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를 제물로 17개로 타이기록(디지 딘)을 세웠다. 시즌 후 펠러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풀타임 선발투수가 된 펠러는 17승(11패)과 240삼진을 기록하며 7시즌 연속 탈삼진왕의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10월2일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18개의 삼진을 잡아내 나침내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277⅔이닝에서 무려 208개의 볼넷을 내주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부문 신기록도 세웠다. 지금까지 한시즌에 200개 이상의 볼넷을 내준 투수는 펠러와 놀란 라이언(1977년 204개, 1974년 202개) 뿐이다. 이후 펠러는 3차례 더 볼넷왕에 오르긴 하지만, 제구력은 점점 좋아져갔다.
'래피드 로버트'의 시대가 열리다
1939년 펠러는 24승(9패)과 246삼진으로 5시즌 연속 다승-탈삼진 1위의 스타트를 끊었으며, 방어율도 전년도 4.08에서 2.85로 낮춰 리그 3위에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최고의 시즌을 맞이했다.
1940년 펠러는 27승(11패)과 261삼진, 2.61의 방어율로 트리플크라운을 차지했다. 코미스키파크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한 개막전에서는 섭씨 영상 8도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클리블랜드는 정규시즌 마지막 3연전을 앞두고 리그 1위 디트로이트에 2경기 뒤져 있었다. 마침 마지막 3연전의 상대는 디트로이트. 1차전에 선발로 나선 펠러는 3안타 2실점으로 분전했지만, 타선이 디트로이트의 신인투수에게 당하며 0-2로 패했다. 클리블랜드는 남은 2경기를 모두 잡아냈지만 결국 1경기 차 2위에 머물렀다.
1941년에도 펠러는 무려 343이닝을 던지며 25승13패 방어율 3.15 260삼진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리그 5위에 그쳤다.
진주만 공습, 8개의 무공훈장
1941년 12월8일. 연봉 재계약을 위해 차를 몰고 구단으로 향하던 펠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긴급뉴스를 들었다. 바로 '진주만 공습'의 소식이었다.
펠러는 곧바로 핸들을 꺾었고, 그로부터 3일후 스타 메이저리거로는 행크 그린버그(디트로이트)에 이은 2번째로 군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펠러는 암으로 작고한 아버지 대신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고 있어 징집 대상자가 아니었지만, 이것은 펠러에게 이유가 되지 못했다.
전함 앨라바마(USS Alabama)호에 배치된 펠러는 160km의 강속구를 뿌리는 대신 분당 160발이 발사되는 40mm 대공포 사수를 맡았다. 유명 메이저리거 대부분이 후방에 배치된 반면, 펠러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북해에서 독일 U-보트와 맞섰으며, 태평양 전선에서는 마셜섬 전투, 괌 상륙작전, 도쿄 공습 등 수많은 역사적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8월22일 펠러는 가슴에 8개의 무공훈장을 달고 제대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운드에 올라 9경기 중 7경기를 완투하며 5승3패 방어율 2.50을 기록했다.
전쟁영웅, 야구영웅으로 돌아오다
펠러는 복귀 첫 시즌인 1946년 26승15패 방어율 2.18을 기록하며 변함없는 괴력을 뽐냈다. 특히 선발 42경기 중 36번을 완투하며 371⅓이닝을 던졌고, 6차례 불펜투수로 나서 4세이브를 기록했다. 또 막강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통산 2번째 노히트노런에 성공했다.
특히 348개의 삼진을 잡아내 메이저리그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1965년 샌디 쿠팩스(LA 다저스)가 382삼진을 기록하기 전까지 신기록으로 남았지만, 훗날 1904년 루브 웨델(뉴욕 자이언츠)의 기록이 349개로 수정되면서 자리를 내놓았다.
20승11패 방어율 2.68 196삼진을 기록한 1947년은 펠러가 마지막으로 다승과 탈삼진을 동시석권한 시즌이었다. 이후 펠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1948년 펠러는 19승15패 방어율 3.56 164삼진에 그쳤다. 5시즌 연속 다승왕은 중단됐고, 7시즌 연속이자 마지막 탈삼진왕에 올랐다.
이 해 클리블랜드는 28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와 격돌했다. 펠러는 1차전에서 1실점 완투에도 불구하고 패전투수가 됐다. 1실점 역시 8회말 석연치 않은 세이프 판정을 받은 2루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내준 것이었다. 펠러는 5차전에서도 5⅓이닝 7실점 패배를 당했지만, 클리블랜드는 밥 레먼이 2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1949년 15승14패 방어율 3.75, 1950년 16승11패 방어율 3.43으로 하향세를 막지 못했던 펠러는, 이듬해 22승8패 방어율 3.50으로 통산 6번째이자 마지막 다승왕에 오르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또 디트로이트전에서는 통산 안타를 내주지 않으며 3번째 '노히터'를 기록했지만, 에러로 내보낸 주자가 도루→견제 악송구→희생플라이로 홈을 밟으며 '노런'은 되지 못했다. 펠러는 3개의 노히터와 함께 무려 12번의 '원히터(1-hitter)'를 기록했다.
1952년 펠러는 9승13패 방어율 4.74에 그치며 풀타임 11시즌만에 처음으로 10승에 실패했고 처음으로 5할 이하의 승률을 기록했다. 1954년 클리블랜드는 다시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하지만 펠러는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고, 클리블랜드는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에 4연패로 물러났다.
1955년 만 36세가 된 '17세 소년'은 마침내 선발진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2년간 5승을 더 올린 후 1956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펠러는 은퇴 후 사업가의 길을 걸어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1957년 클리블랜드는 펠러의 19번을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1962년에는 명예의전당 투표에서 93.75%의 높은 득표율을 얻으며, 1936년 월터 존슨-크리스티 매튜슨 이후 처음으로 투표 첫 해 입성하는 투수가 됐다.
[사진〓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 공식 홈페이지]
(김형준 야구전문기자 generlst@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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