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등록, 조선왕조실록(1)

2005. 7. 1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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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초 삭제하거나 내용 수정하면 참형사초실명제에 대한 필화사건은 사관의 직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준다. 예종1년(1469년)〈세조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자 세조대에 사관을 역임한 민수도 관례대로 자신의 사초를 제출했다. 그런데 민수는 자신이 비판한 양성지가 실록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실록청 기사관 강치성을 찾아가 실록청에 제출한 자신의 사초를 몰래 꺼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제출한 사초를 다시 꺼내는 것이 불법이지만 민수를 동정한 강치성은 사초를 꺼내 주었고 민수는 문제가 될 만한 항목을 고친 후 다시 제출했다.

문제는 두 사람의 비밀행동이 실록청의 다른 관리들에게 알려졌다는 점이다. 당시 사초수정은 물론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관리는 극형을 받게 되었음으로 이를 우려한 다른 관리가 이들의 불법사실을 밀고했다. 민수가 사초에서 고친 것은 모두 세조대의 대신들의 비리를 비판한 것으로 특히 실록청의 책임자로 부임한 양성지에 대해서였다. 그는 양성지가 대사헌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옥사가 있어 사헌부 관리가 전원 좌천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사헌부의 최고책임자인 양성지가 책임지고 물러나지 않은 사실을 비판했지만 이 사실이 양성지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서 그에 대한 기록을 삭제했다. 원숙강도 권람이 큰 저택을 지은 사실을 비판했다가 나중에 이를 삭제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민수 상관비판기록 공개 두려워 사초 고쳐 세종대왕실록. 예종은 원숙강을 문초했다. 문초과정에 예종은 사초를 고칠 때 권람을 비판한 기사는 삭제했는데도 정작 세조를 비판한 기사는 삭제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예종 : 너는 재상의 허물은 삭제했으면서 임금의 허물은 그대로 둔 이유가 무엇인가?원숙강 : 대신을 거스르면 그 화가 빠르기 때문에 삭제했습니다. 더구나 군주의 일은 의정부와 육조의 등록에 실려 있으므로 신이 비록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기록에 남습니다.

민수와 원숙강은 사초실명제로 자신의 상관에 대한 기록 내용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사초를 고친 것이지만 이는 가장 큰 죄를 범한 것이었다. 원숙강과 강치성은 참형되었고 민수도 참형 대상자였지만 예종의 세자 시절에 서연관(세자의 스승)이었음을 감안하여 장 100대를 맞고 제주도의 관노가 되었다.

사관의 시련은 연산군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성종 때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사림은 사관 직을 비롯한 이른바 청직(淸職)을 모토로 했음으로 기득권층인 훈구세력의 비리와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훈구파들이 사림들을 곱게 볼 리 없었고 그들을 몰아 낼 명분을 찾고 있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성종실록〉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극돈이 실록청의 책임자가 되자 그는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던 김인손이 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쓴 사초에서 자신의 비행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초에 기록된 이극돈의 비행은 성조 때 불경을 외고 전라도관찰사 재임시에 정희왕후 상을 당했을 때 관기와 더불어 주연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개인 사감과 비리 삭제요구 거절이 무오사화 발단이극돈은 곧바로 유자광을 찾아갔는데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이자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김종직은 남이(南怡) 옥사를 일으켰던 유자광을 미워하여 유자광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누각현판에 걸어두었던 시를 철거해 불태워버릴 정도였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신진사림을 대거 숙청할 빌미로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을 이용했다. 김일손은 사초에서 단종인 노산군의 시신이 숲 속에 버려져 거두는 자가 없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는데 한 백성이 밤에 시신을 업고 달아나서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했으며 이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충정이 깃들어 있다고 논평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의제문’은 외견상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사실을 두고 의제를 조문하여 지은 제문이나 실은 의제를 단종으로, 항우를 세조에 빗대어 그의 집권이 반인륜적인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조의제문’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김일손의 방자함은 김종직의 문인 전체로 확대되었고 김종직의 문집에서는 또 다른 세조 비방 사실이 발견되었다.

유자광 등은 연산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무도한 행위를 했고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반역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제출하라고 명했다. 이 때 이극돈은 사초는 군주가 볼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연산군에게 제출했다.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데 사사건건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왕권을 제약하던 사림들을 싫어했으므로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내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성종 때 정계로 진출한 대부분의 사림은 죽거나 유배당했다. 이것이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제일 처음인 무오사화이다. 특히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굳이 사화(士禍)가 아니라 사화(史禍)라고 불리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왕조실록, 유래 없는 실화서이나 한계성은 있어『조선왕조실록』이 『훈민정음』 등과 함께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조선왕조실록』이 모든 면에서 완벽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윤영인은 『조선왕조실록』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논할 때 동아시아의 다른 실록에 견주어 볼 때 비교 우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적었다.

"황명실록", 줄여서 "명실록"이라고도 하며 총 2900여 권의 분량으로 돼 있지만 글자 수는 총 1600만자에 불과해 "조선왕조실록"의 6400만 자에 비해 못 미친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국가의 공식 기록이며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천체현상도 과학적인 연구의 소산이 아니라 천체 현상이 정치적인 요소와 결합하기 때문에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역대 왕들의 실록을 빠짐없이 기록했지만 각 왕들에 대한 기록에도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어 실록이 일부 왕대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편찬된 『헌종실록』의 경우 내용이 특히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기록하는 항목이나 항목별 기사의 비율도 일정하지 않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이 워낙 장시간에 걸쳐 만들어졌으므로 실록을 만드는 사람들의 자질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실록이 편찬된 시대나 사관이 다르므로 기록할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는 각도가 다르고 사관들의 지식수준이나 관심도에 따라 정확성에도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절대군주의 모든 행동 낱낱이 기록할 수는 없는 일"더구나 사관들이 항상 붓을 들고 왕을 따라다니면서 국왕의 모든 언행을 빠짐없이 기록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것이다. 국왕들은 원하면 얼마든지 사관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하들과 밀담을 나눌 수 있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절대군주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태생적인 한계를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하는 사관들이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당쟁이 심해지면서 사관들의 당파나 개인적인 의견에 의한 편견도 많이 작용했는데, 사관을 구성하는 주요 관직이 집권당에 의해 독점되어 실록 편찬의 공정성을 잃기도 했고, 정권이 다시 바뀌면 수정 또는 개수 실록이 다시 편찬되기도 했다.

즉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에는 『수정선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이 만들어졌고 『현종실록』에는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에는 『숙종실록보궐정오』가 별도로 있다.

비판 있지만 세계 최장기간인 472년간 기록 인정받은 실화서일부 학자들의 신랄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이 『훈민정음』 등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서울대 규장각의 조선왕조실록 서고(사진 조민근). 우선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472년)에 걸쳐 기록된 자료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당나라 『순종실록』 5권과 송나라 『태종실록』 20권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 왕조를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대표적인 중국의 실록으로 『황명실록』과 『대청역조실록』가 있는데 전자는 260년에 불과하고 후자도 296년에 불과하다. 베트남의 『대남식록』의 경우는 더욱 짧아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0년에 걸친 기록이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다른 나라의 실록보다 내용이 풍부하다. 일본의 『삼대실록』이나 중국의 『황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비하여 기록내용이 매우 부실하다. 『황명실록』의 경우 2964권이나 되는데도 글자 수는 총 1600만자에 불과하나 『조선왕조실록』은 총 6400만 자 인 것만 보아도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이내 알 수 있다.

셋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블랙박스로서 의미로서도 큰 의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매우 다양하여 가히 백과사전이라 부를만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정치ㆍ외교ㆍ군사ㆍ제도ㆍ법률ㆍ경제ㆍ산업ㆍ교통ㆍ통신 등은 물론 천문ㆍ지리ㆍ음악ㆍ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 같은 천문현상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과학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지적이다.

넷째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꾸밈없이 담겨져 있어 조선 시대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왕과 모든 관료들 심지어 향촌의 유생들까지 그들의 언행을 살펴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단순히 있는 사실을 정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교적 명분에 의거하여 역사적 시비득실을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러므로 ‘내가 무서워하는 바는 하늘과 사관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관의 평가를 높이 평가했다.

"사관의 독립성・기록 비밀성 보장됐던 객관적 사료" 인정다섯째 『조선왕조실록』이 어느 사료보다 중요성을 인정받는 것은 일부 오손된  부분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라는 점이다. 사관은 독립성과 기록의 비밀을 보장받은 전문 관료로서 왕이라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음으로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료를 정리할 수 있었다.

여섯째 472년이라는 오랜 동안 실록이 보존되어 온 것도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다는 점이다. 조선 정부는 국가의 정사라고 볼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서 4대 사고(史庫)를 만드는 등 기록 보존에 힘썼다. 사실상 조선시대에 많은 전란이 있었음에도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보존에 그만큼 공이 들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은 단 4부를 찍기 위해서 금속활자를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중국ㆍ일본ㆍ몽골 등 동아시아 각 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역사 연구에서 중국의 자료는 그 양과 질에서 다른 어느 국가의 기록보다 월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왕조는 중화사상에 젖어있어 외국과의 교류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균형도 맞지 않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의존하면 동아시아 각 국의 관계사를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록포쇄제명, 서고에서 실록을 꺼내 말리는 작업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단적인 예는 여타 외국 실록보다 과학적인 자료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이는 17세기 소빙하기에 대한 연구 자료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태진 박사는 일련의 논문에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1500년부터 1750년까지 250년 동안 지구가 커다란 운석군을 만나서 여러 가지 기상 이변을 겪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현상이 한랭화였는데 『조선왕조실록』처럼 이 시기를 정확하게 기술한 자료는 없다고 발표했다.  이 시기를 소빙기로 간주하는데 그 당시 역사 전개는 세계적으로 다른 시기와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한국, 일본, 만주를 비롯하여 각국이 자연 환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644년 중국 왕조의 교체도 이 당시에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 당시의 천재지변 때문에 유독 정치적인 변혁이 많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반면에 중국의 『황명실록』과 『대청역조실록』에 나타나는 천체나 자연 현상은 워낙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소빙기 연구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윤영인 박사는 적었다. 중국의 실록에서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것은 천체의 이상 현상이 곧바로 황제의 실정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천체기록만 보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의 다양하고 충실한 기록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한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편중적 역사 기록인 데다가 당시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사론이므로 붕당간의 시각 차이로 객관성이 결여되고 승자의 시각에서 편찬했다는 비판도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왕실과 조정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이나 지방의 실정을 소홀히 다루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철저하게 당대의 모든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수록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그 어느 유산보다도 값지다고 볼 수 있다. 몇몇 오류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 『조선왕조실록』의 공정성과 의미를 다소 저하시키는 감은 있으나 실록 모두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국역해 CD-ROM 전산화 한 건 "학문적 혁명"으로 평가한편 『조선왕조실록』은 대규모의 한국어 번역사업과 전산화 과정을 통해 그 어느 나라의 전근대 역사기록보다 철저하게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대중화란 대중이 사료 해석의 주체가 된 것을 말하며 나아가서는 그 해석을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은 남ㆍ북한에서 모두 번역이 이뤄졌는데 북한에서 20여 년, 한국에서 는 25년이 걸렸다. 특히 국역 사업에 이어 『조선왕조실록』의 CD-ROM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의 CD-ROM 전산화야말로 학문적인 ‘혁명’이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그 파급효과는 크다.

디지털 미디어의 최대 장점은 검색 기능인데, 『조선왕조실록』은 일반 책의 목차나 색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본문 속의 모든 단어가 어절(語節) 단위로 색인화 되어 있다. 즉 디지털 미디어의 검색 기능은 『조선왕조실록』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편년체 사료의 산만함을 극복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출현되자 전에는 소홀했거나 찾아볼 수 없었던 분야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으며 나아가 새로운 역사 연구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근래 조선시대에 관한 책들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TV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조선왕조실록』의 대중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밀랍이 떨어져 나가면서 크게 훼손된 "성종실록", 아래는 손상된 글자를 확대한 사진(사진 조운찬). 학자들은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은 세계화의 거센 물결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외국의 문화에 대응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세계화를 위한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 모두가 동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인정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과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를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조선왕조실록』의 중요도를 더욱 높여준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만이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만의 역사 기록이 아니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인류의 자산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를 두고 한국 문화가 세계화 과정에서 이룬 또 하나의 큰 성과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은 1998〜99년에 전면적인 조사를 받았는데 1229책 중 약 10퍼센트인 131권의 훼손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특히 <세종실록>은 154책 중 절반이 넘는 86책이 불량본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손상 정도가 심한 131권의 대부분이 밀랍본(蜜臘本)이라는 사실이다.

밀랍본은 <태조실록>에서 <명종실록>까지만 나타나는데, 밀랍본 실록 614책을 기준으로 할 때 훼손율은 21퍼센트로 높아진다.

밀랍본은 벌집에서 추출한 밀랍성분을 종이에 입힌 책으로 책의 수명을 높이기 위해 고려말・조선 초기에 주로 사용되었다. 종이에 밀랍을 입히는 것은 당시 중국에서도 활용된 최첨단 기법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벌레에 의한 손상을 막는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장기간 보관하기위해 채택한 최첨단 밀랍법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많은 실록을 훼손한 것이다.

장기보관 위해 철저하게 관리된 "조선왕조실록"용인대학교의 박지선 교수는 “밀랍본은 일반 한지로 만든 생지본(生紙本)에 비해 손상 정도가 심하고, 일부는 책장끼리 붙어 있어 내용을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이에 입히는 밀랍의 양이 줄어들고, <명종실록> 이후에는 아예 밀랍을 쓰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미 당시에도 훼손이 나타나자 더 이상 밀랍본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여하튼 서울대 규장각은 2004년부터 손상된 일부 실록의 복구 방안을 찾고 장기 보존책을 마련하기 위해 실록을 ‘해부’하는 작업을 벌여 왔다. 이를 위해 우선 조선시대 당시 실록이 어떻게 제작됐고 또 어떻게 관리했는지 정밀한 역추적 작업을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흔히 『조선왕조실록』은 최초에 만들어 졌던 그대로 온전히 전해졌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후대에 꾸준한 개보수를 통해 유지돼 왔다는 것이다.

규장각 신 병주 학예연구사는 “조선 전기부터의 원본으로 알려진 ‘정족산본’중에도 군데군데 후대에 새로 만들거나 보수한 책들이 끼여 있었다”고 밝혔다. 제작과 보관에 아무리 완벽을 기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훼손되거나 사라진 책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만큼 꾸준한 개보수가 최선의 방법인데 조선도 이를 따랐다는 것이다.

실록을 보전하기 위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흔히 실록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4대서고 체제’를 든다. 실록을 한 곳에 모아두는 대신 지방 곳곳에 서고를 만들어 각각 보관함으로써 화재 등의 위험을 분산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리스크 헤지’방식이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실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 실록의 제작과 보관의 전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은 “조선시대의 실록의 제작과 관리는 단순한 서책 제작과 보관을 넘어선 국가적 대역사였다”고 발표했다. 단지 『조선왕조실록』을 분산 보관하는 차원을 넘어 고도의 관리체계가 뒷받침됐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것이 『실록청의궤』인데 이 의궤는 실록청이 남긴 백서로 실록을 제작해 서고로 봉안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물론 투입된 물자와 투입된 인원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사후관리도 마찬가지다. 지방 서고의 실록들은 매 2〜3년마다 꺼내 바람에 습기를 말리는 ‘포쇄’과정을 거쳤다. 이때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전 과정을 감독했으며 다시 실록의 보관 상태를 소상히 점검해 「실록형지안」이라는 문서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nbsp;<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nbsp;<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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