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조양동유적 발굴 20년만에 보고서 완간
4세기 이전 초기 신라 실체 구명 중요 열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4세기 무렵, 경주 평야 일원에 황남대총으로 대별되는 거대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 출현하기 이전에 신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참으로 오랜 의문 덩어리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지금의 경주에서 박혁거세가 건국했다고 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도무지 적석목곽분 이전의 신라는 흔적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갈증은 1970년대 말에야 경주 조양동 유적이 발견, 발굴됨으로써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조양동 유적이 어떠했을까? 1977년 11월, 이곳 주민 김대환(金大煥) 씨가 주택 개축을 위해 기존 집을 철거하고는 집터를 고르다가 덮개와 받침대를 모두 갖춘 목이 긴 항아리인 유개대부장경호(有蓋臺附長頸壺)를 비롯한 유물 8건 22점이 출토됐다.
이 사실은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 한병삼(韓炳三)에게 알려져, 박물관은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1979년에 시작된 조사는 1983년까지 무려 5차에 걸친 대규모 발굴로 확대됐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필두로 고려시대 유적까지 긴 시기에 걸쳐 조성된 유적 77기와 다량의 유물이 확인됐으나, 단연 압권은 4세기 이전 초기 신라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사실이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곳에서는 적석목곽분 등장 이전, 즉,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 무렵 고분만 해도 목관묘 27기, 목곽묘 12기, 옹관묘 15기가 무더기로 확인됐다.
그 중에서도 더욱 압권은 조사단이 조양동 38호분이라고 명명한 목관묘였다. 기원전 1세기 후반 무렵에 축조되었다고 생각되는 이 무덤에서는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 사유경(四乳鏡) 등의 중국 수입품 동경(銅鏡) 4점이 출토됐다.
중국 수입품이 출토되었다고 무슨 대수일까. 하지만, 그런 수입품을 출토한 무덤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축조됐다면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그것이 경주 땅에 유입된 정확한 통로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에 이미 경주지방 거주집단은 중국대륙과 어떤 식으로건 교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무역이 이뤄진 시점이 삼국사기 등이 말하는 신라 건국시점과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신라 건국신화에 의하면 박혁거세를 필두로 석탈해, 김알지의 소위 신라 삼성(三姓) 시조는 모두 외부 도래인이다.
이 때문에 신라 초기사 연구에서 이 유적이 차지하는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구정동이나 사라리와 같은 인근 지역에서 비슷한 시대 유적이 확인되기도 했으나 지금도 조양동 유적은 그 중요도에서 `절대강자"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발굴이었음에도, 어찌된 셈인지 그 발굴보고서는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발굴 종료 무려 20년이 지난 최근에야 완간됐다.
국립경주박물관은 1차 조사(1979) 성과를 담은 `조양동유적Ⅰ"을 2000년에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2-5차 보고서 사진 편을 낸 데 이어 최근에야 그 본문편을 정리한 `경주 조양동 유적Ⅱ"를 냄으로써 마침내 무거운 짐을 덜게 됐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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