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 9호세대 비화](38)펜은 칼보다 강하다

2004. 10. 8.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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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도서관 농성 사건 1주일째인 1977년 11월 17일 저녁 무렵이었다. 농성장에 있다가 연행돼 조사를 받고 훈방되는 학생을 인수하기 위해 학교 버스가 관악경찰서로 가고 있었다. 이 버스가 낙성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니 저건...?" 버스에 타고 있던 관악서 형사의 눈이 번쩍였다. 철학과 4학년 김영현(현 실천문학사 대표, 소설가)이었다. 그가 보자기에 뭔가를 싸서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버스가 급정거했다.

관악 운동권에 "피"바람을 몰고 온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피(P)는 유인물을 지칭하는 운동권의 은어이다. 김영현이 든 것은 등사기였다. 그의 양말 속에는 유인물 초안이 숨겨져 있었다.

급정거한 버스를 본 김영현은 놀라 자빠질 뻔했다. 황급히 골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렇게 재수에 옴이 붙을 수가! 들어간 곳이 하필이면 막다른 골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형사에게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김영현이 잡힌 다음날인 11월 18일을 전후해 서울대는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휩싸였다. 이름하여 "11-18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 이 사건의 성격을 제대로 규정하는 명칭은 아니지만 학생운동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문약한 아마추어들의 대사건집이나 학교에서 형사에게 체포된 학생들은 영문을 잘 알지 못했다. 일을 한 것도, 꾸민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이었다. 학내 사찰기관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엄청난" 일을 저질렀거나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큰 위험인물이었다.

주인공은 인문대 74학번 4인방이었다. 먼저 잡힌 김영현과 국문학과 김사인(현 동덕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미학과 김태경(현 이론과실천 대표), 철학과 이을호(전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뒷날 우리 사회의 변혁이론과 문화운동의 핵으로 떠오를 거목들이 이렇게 한 올가미에 걸린 것도 공교로운 일이다.

김영현은 1990년대 초 민중문학과 자유주의문학 진영 간의 치열한 공방을 야기한 "김영현 논쟁"의 주인공이다. 그는 1980년대를 풍미한 노동문학과 NL문학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학을 추구함으로써 "90년대 문학"의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평단으로부터 받고 있다.

이을호는 1980년대 재야-운동권의 핵심 논제였던 "NL-PDR 이론"을 정립한 주인공이다. 그는 민청련 정책실장 시절인 1984년 4월 내부 세미나의 주제발표를 통해 당시 운동권의 운동론을 CDR(시민민주혁명론)-NDR(민족민주혁명론)-PDR(민중민주혁명론) 등 세 가지로 정리함으로써 이른바 "C-N-P논쟁"에 불을 붙였다.

김사인은 1980년대 문단의 강력한 흐름을 이룬 "노동문학"의 좌장이다. 그는 1989년 박노해 등과 함께 월간지 [노동해방문학]을 창간해 발행인을 맡았은데, 이 때문에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1980~90년대 문학사에서도 절제된 미학으로 표현한 시와 깊이 있고 균형잡힌 평론으로 당대의 감성과 이론을 이끌었다.

김태경은 1980년대 인문-사회과학 서적 출판 붐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학생운동권의 이론적 자양분이 된 각종 서적을 가장 많이 번역-소개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영어로 된 "읽기 어려운" 인문-사회과학서적 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그에 의해 처음으로 완역돼 출판됐다.

이들 인문대 74학번 4인방은 언더그룹에 속하지 않았다. 족보(서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조직이나 인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이들은 "거사"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운 적도 없었다.

판결문에는 이들 인문대 4인방이 1977년 9월 초순부터 23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신림동 이을호의 집에서 회합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반대-비방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하기로 모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전부이고,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이들은 운동권 본진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사회적-시대적 인식은 같이하고 있었다. 김사인의 말을 들어보자. 지하출판계의 거물로 뜨다"우리는 3월과 11월에 먼저 간 친구들하고는 달랐다. 그쪽은 전부터 있었던 학회의 전통적인 맥과 학생운동이라는 이름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정치공학적 고려나 조직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문약(文弱)한 존재였다. 자생적으로 모여 냉소하고 자학하며 실존적 고민과 결단을 한 문사(文士)랄까, 좋게 말하면 순수한 로맨티스트였고, 나쁘게 말하면 나이브한 아마추어였다."하지만 이들은 "칼"보다 강한 "펜"을 갖고 있었다. 4명 모두 학내 유명인사이자 쟁쟁한 논객이었다. 김영현과 김사인은 [지양(止揚)] 창설 멤버였다. [지양]은 휴학했다가 복학한 불문과 73학번 박승옥(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위원)이 앞장서서 1976년 창설한 인문대 교지이다. 74학번으로는 김영현-김사인과 동양사학과 허원(현 서원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김영현은 또 1976년 대학문학상에 단편 [닭]이 입선해 문학적 소양을 인정받았고, 이 때문에 편집실에 참여해 급격히 의식화됐다. 김사인 역시 [대학신문] 등에 여러 차례 시를 발표해 후배들에게 문학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김사인은 1977년 4월 육당-춘원의 준비론과 단재의 투쟁론을 비교하는 인문대 첫 학술대회의 사회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공개무대에 얼굴을 드러냈다.

이을호는 74학번에서 거의 "전설적" 존재로 지금껏 회자된다. 74학번 동기들은 "전주고를 전무후무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 입학해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은 수재"로 그를 기억한다. 그는 학군단에 지원했는데 학군단 성적까지 최고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체구가 작고 몸이 약골이었지만 구보에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그는 관악경찰서 "블랙리스트"에도 빠져 있었고, 교수들도 그의 재주를 아끼고 보호해주었다(이 사건으로 그는 검거돼 조사를 받지만 기소되지 않는다).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철학과에 헤겔 강의가 없었다. 마르크시즘과 같은 과학적 이론의 토대인 헤겔을 강의실이 아니라 비밀 스터디그룹을 통해 배워야 할 판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김영현은 "[헤겔 예술-종교-철학 서설](그렐 편)과 [19세기 사회사상사](헤겔 저)를 우리가 번역하기도 했다"고 최근 회고했다(인문대 교지 제호를 헤겔의 변증법에 나오는 용어인 "지양"으로 정한 것도 이들의 헤겔에로의 "지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서울대에 헤겔 강의 자체가 없어 교수를 압박해서 강좌를 개설했다. 소외-노동, 역사의 진보 등의 개념이 우리에게 굉장히 어필했지만 우리끼리 공부하다 한계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을 강의해달라고 했는데, 오히려 교수가 쩔쩔 맸다. 특히 이을호는 독어에 능통해 교수보다 더 잘 했다. 학생들이 더 잘 하니 중도하차할 수밖에...." "책을 좋아하는 후배" 강금실(전 법무부 장관, 법학과 75학번)과의 러브스토리(1984년 결혼해 2000년 이혼)로 유명한 김태경은 이 무렵 이미 출판에 눈을 떠 지하출판물 공급책으로 출판계에 데뷔(?)한 상태였다. 그는 폭압적인 사회체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서클 같은 조직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서클도 일류 특급 서클이 있고, 이류가 있고, 물정을 모르는 나 같은 경우도 있었다"며 "인문대 멤버들은 세련되고 이론무장된 그룹이 아니었다"고 최근 술회했다.

"2학년 때까지 어중간한 야학을 하다가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만들어 뿌렸다. 모리스 돕, 폴 스위지 등으로 대표되는 신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소개했다. 휴버만, 카스트로 분석서도 계속 만들어 팔았다. 1977년에는 눈이 뒤집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영인해서 뿌렸다."김태경의 최근 회고다. 그는 1년여 옥살이를 하고 출감한 뒤에도 고려대 "민우지 사건"의 정진영(현 미국 거주)과 함께 민중문화사를 운영하며 지하출판물을 계속 공급했다. 그는 1980년 12월 무림사건이 터졌을 때도 학생들의 좌경-용공이론 공급책으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딱지를 달고 옥고를 치렀다.

"예비"되지 않은 일도 단죄김영현의 검거로 촉발된 11-18사태는 이들 인문대 4인방이 날벼락을 맞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허원 등 인문대 편집실 관계자들이 고초를 겪었고, 특히 김영현에게 등사기를 살 돈을 빌려준 불문과 여학생 임모양도 조사를 받고 "자퇴" 처리되는 불행을 당했다. 임양은 당시 청와대 실력자인 임모씨의 딸로서 서울대 입학 당시 예비고사 수석을 차지한 재원이었다.

더욱 기막힌 일은 반병률(현 한국외대 교수) 등 75학번팀이 이 사건에 얽혀든 것이었다. 반병률은 11-11사태 때 도서관에 있다가 탈출에 성공해 구속을 면한 역철회의 대표주자였다. 당시 그는 역철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75학번 전체 언더그룹 모임의 멤버로 나가고 있었다. 즉 다음해인 1978년 투쟁을 기획하고 지도하고 또 직접 "동"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로 75학번 그룹 사이에 묵계가 이뤄져 있었다.

충북 음성 소작농가의 4남 1녀 중 막내로서 경기고를 졸업하고 재수해서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긴급조치 9호 세대에는 그리 별난 게 아니지만 세 번이나 인생이 바뀌는 굴절을 겪는다. 대학 입학 당시 판-검사를 꿈꿨던 그는 역철회에 가입한 뒤에는 직업운동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에는 병대위 활동을 하다가 재차 구속, 긴급조치 9호로만 별을 두 개 달게 된다. 하지만 그 뒤에는 공부하는 길로 나가 학계에 정착한다.

판결문에는 반병률이 1977년 11월 4일 봉천동 소재 호남집에서 김영현 등을 만나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반대-비방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할 것을 모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호남집은 긴급조치 9호 시대 공소장에 자주 등장하는 주점이다. 김영현과 75학번의 연결고리가 바로 이 호남집 모임이었다.

호남집 모임에는 두 사람 외에 김영현의 경북고 후배인 철학과 이창호(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팀장)와 고고학과 배남효(현 대구 학교운영협의회 집행위원장, 관악민주포럼 부회장)가 있었다. 둘 다 75학번으로서 이념서클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의식분자"였다. 이창호는 이 사건으로 검거됐다가 11-11사태에 얹혀 기소됐고, 배남효는 도피행각을 벌이다 이듬해 6월에 검거돼 따로 재판을 받게 된다.

이 사건은 실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비"되지도 않은 일을 무차별로 단죄한 긴급조치 9호 시대 사건의 전형에 속한다. 이 사건에 연루된 또다른 인물인 이증연(현 국민은행 차장, 국문학과 75학번)과 주재석(현 두산중공업노조 회계감사, 철학과 75학번)의 경우를 보면 더욱 그렇다.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경찰이 가만히 놔뒀더라도 이들은 거사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논의는 무성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거사 모의는 두 갈래로 이뤄졌다. 김영현을 중심으로 한 74학번 그룹과 반병률을 축으로 한 75학번 그룹이 각자 따로 거사를 도모한 것이 호남집 모임을 고리로 하나의 사건으로 묶여 확대 조작된 것이다. 김사인의 최근 회고."손가락만 까딱해도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평소 의기투합했던 네 사람이 뭔가를 하기로 했다. 학회 쪽에서 어떤 준비를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런 참에 11-11 도서관 점거 사건이 터지자 우리가 도모하던 일이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 선에서는 그 일이 보류됐고, 다음 단계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는 결정되지 않았다."김영현이 걸려든 유인물 배포 건은 나머지 3명과 관계없이 진행된 것이라는 얘기다. 김영현은 순수한 격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실존적 고뇌도 깊었다. 그는 "학문의 자유가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진실이 뭔지 말할 수 없어 인간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당시의 고뇌를 최근 토로했다. 그는 "4명이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해 혼자 일을 추진했다"고 술회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김지하-김민기 등 윗세대는 영웅적인 투쟁을 했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는 자학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관악 1세대인데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대로 졸업하는 것은 부끄럽다는 생각이었다. 이을호-김사인은 노선이 달라 격앙된 상태에서 헤어졌다. 김태경은 이 사건이 아니었으면 더 크게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74학번과 하는 것을 포기하고 75학번과 함께 하기로 했다."김영현은 검거된 날 이을호의 집에 맡겨놓은 등사기와 종이를 자신의 하숙방으로 가져가던 중이었다. 양말 속에 숨긴 유인물 초안은 11-11사태 후 학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맹휴학"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실수와 허점 투성이 운동반병률도 비슷한 경우였다. 그 역시 김영현처럼 뭔가 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앞서 유인물 작업을 서둘렀다. 11-11 도서관 농성 때 도망나왔다는 "죄의식"도 있었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삼일빌딩에서 유인물을 공중낙하할 생각이었다. 유인물 작업을 한 경험이 있는 역철회 동기 이증연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증연은 조언은 했지만 그의 계획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증연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연유는 이게 전부였다.

이증연은 천안공고를 나와 3수해서 서울대에 입학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된 다른 문사들과 달랐다. 나이도 많은 데다 투사로서의 자질과 분위기를 휘어잡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서클 회장은 대개 2선이 맡는데 그는 역철회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숨은 1선이었다. 그 역시 이듬해 학생운동을 이끌 75학번 언더그룹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반병률의 얘기를 들어보면...."이증연은 내가 잘 했으면 보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늘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그래서 그때 다치지 않았다면 남아서 크게 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까지도...."주재석은 신림동 빈민가에서 야학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이창호와 함께 자취를 했다. 후경회 소속인 그는 반병률이 자취방에 맡겨놓은 등사기 때문에 학교에서 제적되고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는 이듬해 군에 가면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게 된다. 김영현-반병률의 소설적, 또는 인문학적 고뇌와 상상력의 제물(?)이 된 주재석-배남효-이창호는 뒷날 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자적 삶을 살게 된다.

관악에 남아 있던 비조직적 운동권이 일망타진되는 사태를 부른 이 사건은 소설과 같은 기막힌 우연과 지독한 불운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인 김영현은 자신에게 닥친 우연과 불운을 당위와 필연으로 바꾸어 긴급조치 9호 시대, 긴급조치 9호 세대의 아픔을 자신의 문학작품 속에 깊이 투영하고 있다.

"양춘승-김경택 등은 뛰어난 전략가이고 투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나약하고 조직도 없고 문약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우리의 저항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거사를 하고 안 하고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선배세대가 잡혀갔다는 사실만으로 후배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저렇게 징징 짜고 술 마시고 하더니 결국 갔구나.... 이것이 중요하다. 조직적인 "성골운동"보다 자생적으로 바닥에서 일어난 비조직적 운동이 더 귀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수와 허점투성이의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그 시대 운동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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