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전통 창조되거나, 날조되거나

2004. 7. 9.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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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통’이라는 말 앞에는 흔히 ‘유구한’, ‘고래의’ 같은 수식어가따라붙는다. 시간의 안개 저 너머 까마득한 옛날의 선조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것이 전통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전통이야말로 문화적 혈통의부정할 수 없는 보증이며, 공동체 역사의 갖가지 이변을 이겨낸 끈질긴 생명의유전인자다. 그러나 그런 상식적 믿음과는 달리 전통의 상당수는 극히 최근에형성된 것이거나 어떤 정치적 목적 아래 주도면밀하게 만들어진 창작물이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통의 다수는 전통사회의 유산이 아닌 근대의 산물인것이다.

〈만들어진 전통〉(원제: 전통의 창조)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경배받는것들이 근대의 특정 시기에 구성된 발명품임을 역사적 자료를 들어 입증하는책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동료 역사학자들과 함께 쓴 이책은 1983년 출간된 뒤 곧바로 고전의 지위에 올라, 비슷한 시기에 나온 베네딕트앤더슨의 근대 민족주의 형성 연구서 〈상상의 공동체〉와 함께 빈번히 인용되는책이 됐다. 두 책이 함께 거론되는 것은 전통의 창조가 대개는 민족주의의 발흥 및민족국가 성립과 내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기나긴 역사 자랑하는 영국 등 서유럽의 전통기껏해야 100년근세사"근대 발명품"에 장치된 지배층 허구적 논리 폭로 〈만들어진 전통〉은 근・현대 영국의 사례를 주로 다루면서 같은 시기 유럽 다른나라들의 사정을 함께 검토하고 그것들이 유럽의 식민지였던 인도와 아프리카에서어떤 방식으로 재생산됐는지를 살핀다. 이 책은 95년에 〈전통의 날조와창조〉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된 적 있으나 시중에서 사라졌고, 이번에 정식저작권계약을 맺어 전공학자들의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이 책에서 지은이 홉스봄은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의 많은 정치적・문화적전통들이 기껏해야 100~200년 전에 세상에 처음 등장했으며, 특히 1차세계대전전의 30~4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창작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그 시기에전통이 그토록 맹렬하게 창조된 것일까 이 책은 그 이유를 정치・사회의 거대한변화와 연결해 설명한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말 그대로 ‘전통사회’를파괴하고 ‘근대사회’를 창출해가는 과정에서 ‘국민통합’의 중요한 장치로서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삶의 양식이 사회의 격변을 감당할 수없을 때, 시대의 요구에 맞는 전통을 창조해 부여함으로써 안정을 찾는전략이었다는 말이다.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은 전통 발명의 더 직접적인 이유를 제공했다. 특히,군주제가 유지된 영국에서 사태는 더 분명했다. 과거의 신민이 국가의 주체로등장하자 군주는 이들의 복종과 충성과 협력을 얻어내야 하는 새로운 과제에직면했다. 낡은 유물이 된 군주제를 유지하려면 존립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장치가 필요했던 것인데, 그것이 1870년대 이래 왕궁의 공식 기념행사가 점점화려해지고 엄격해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런 엄숙한 의례를 전통의 이름으로연출함으로써 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반역적 힘을 제어하려 한 것이다. 오늘날영국의 아나운서나 기자들은 장대한 왕실 기념식을 묘사하며, ‘천 년 전통의장관과 웅대함’이니 ‘수세기 동안의 선례로부터 비롯된 정밀함’이니 하는 말로그 유구성을 강조하지만, 그 전통이란 게 실은 100년 남짓 된 최근세사의 산물인셈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더 극적인 사례는 스코틀랜드 ‘전통의상’ 킬트의 역사다.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그들을 선조로 모시는 각국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의기나긴 역사와 문화를 응축한 상징물로 이 격자무늬 치마를 주저없이 내세운다.

하지만 그 남성용 짧은 치마의 역사는 최대로 잡아도 300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은 스코틀랜드인이 아니라 잉글랜드인이었다.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병합되고 수십년이 지난 뒤 잉글랜드 랭커셔출신 제철업자 토머스 로린슨이 연료용 목재를 얻기 위해 스코틀랜드 고지대삼림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을 인부로 고용하면서 일하기 편한 옷으로 만든 것이킬트였다. 그러니까 이 치마는 벌목 노동자들에게 입히려는 ‘근대적 사고’의산물이었던 것인데, 이게 19세기 이후 민족의 원형을 찾는 낭만주의 바람이 불면서고래의 전통의상으로 날조되고, 거기에 방직업자들의 농간이 끼어들어스코틀랜드의 민족의상이 되고 만 것이다. 전통이야말로 근대의 발명품라는 역설을확인케 해주는 이 책이 국민통합과 같은 근대적 정치이념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은그 전통 안에 내장된 지배층의 허구적 논리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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