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빨리 사라진 전설의 타이틀…양세종부터 김성한까지 ‘승리타점’의 생과 사

[베팬알기] ⑲KBO & 베어스 역사 속 승리타점 이야기

OB 베어스는 승리타점 부문에서 최초로 2명(1982년 양세종, 1987년 김형석)의 수상자를 내놓은 구단이다. 해태 김성한은 1988년과 1989년 2년 연속 수상자이자 최후의 수상자로 이름을 남겼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9일 이사회를 열고 90년도 개막 경기 일정을 확정짓는 한편 지난 시즌까지 존속했던 승리타점상을 폐지하고 최다안타상을 신설하는 등 90시즌 경기에 따른 일반 원칙을 의결했다.』 <1990년 1월 30일자 경향신문>

‘승리타점상’이란 게 있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출발했던 KBO 타자 부문 공식 개인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1989년까지 8년간 존재하다 짧은 생을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베팬알기-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기록 이야기] 이번 편에서는 빛바랜 추억의 앨범 같은 ‘승리타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베어스 구단은 가장 먼저 승리타점왕과 인연을 맺었고, 짧은 역사 속에 두 번이나 수상자를 배출했다.

OB 베어스 양세종(가운데 16번)은 1982년 KBO 원년 최초의 승리타점왕을 차지했다. 양세종이 홈런을 친 뒤 팀 선배 김우열(왼쪽)의 환영을 받고 있다. ⓒ두산베어스

◆승리타점(Game-Winning RBI)이란?

승리타점. 메이저리그에서는 ‘Game-Winning RBI(GWRBI)’이라고 일컫는다. RBI는 타점을 뜻하는데 ‘Run Batted In’의 줄임말이다. ‘승리타점’은 팀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타점을 의미한다. 요즘엔 ‘승리타점’ 대신 ‘결승타’라는 용어로 치환돼 불리고 있다.

승리타점은 1990년대 이후 야구에 입문한 팬이라면 다소 생소한 기록. 하지만 이는 1980년대에 한국프로야구(KBO)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MLB)와 일본프로야구(NPB)에서도 공식 기록으로 집계된 항목이었다.

승리타점을 가장 먼저 도입한 리그는 역시 MLB였다. 1980년부터 시작해 1988년까지 공식기록 항목으로 집계하다 폐지했다. NPB에서는 MLB보다 1년 늦은 1981년 도입해 1988년까지 공식기록으로 인정했다.

KBO리그에서는 프로야구 리그가 출범한 1982년부터 승리타점을 공식기록으로 집계했고, 승리타점상은 KBO 원년 시상한 10개 개인 타이틀(투수 부문 4개, 타자 부문 6개)에 포함될 정도로 그 시절엔 의미 있는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전문에 소개한 기사처럼 KBO리그에서는 1989년을 끝으로 승리타점상이 사라지고, 1990년부터 최다안타상이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1982년 3월 28일 OB 베어스의 역사적인 최초 경기가 열린 동대문구장의 전광판. MBC를 상대로 9-2로 승리한 이날 3회초 윤동균이 2-1로 역전하는 타점을 올리면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승리타점을 기록했다. ⓒ두산베어스
●승리타점(결승타) 조건

1. 팀이 선취점을 뽑고 역전당하지 않으면 그 선취점을 만든 타점이 승리타점이 된다.

2. 팀이 역전을 하고 그대로 승리하면 역전을 만든 타점이 승리타점이 된다.

3. 위 조건을 충족하는 점수가 ‘타점’이 아닌 경우(실책, 도루, 폭투, 패스트볼, 보크 등)에는 승리타점 기록이 주어지지 않는다.

승리타점(결승타)은 축구의 결승골과는 산정 방식이 다르다.

예를 들어 A팀이 4-0으로 앞서다 최종 스코어 4-2로 이겼다고 치자. 축구에서는 A팀의 3번째 득점을 결승골이라 일컫는다. 만약 4-3로 승리했다면 4번째 득점이 결승골이다. 상대팀보다 1점 앞선 득점이 결승골인 셈이다.

하지만 야구는 다르다. ‘리드’에 방점이 찍힌다.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하지 않으면 최초 리드를 잡은 타점에 ‘승리타점’을 부여한다.

동점이나 역전이 되면 마지막으로 리드를 잡은 점수에 승리타점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승리투수 기록과 흡사한 면도 있다. 선발투수일 경우 리드를 잡고 5회 이상 던져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더라도 후속 구원투수가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하면 승리투수 요건은 리셋(reset)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팀이 1회초 솔로홈런으로 선취점을 뽑아 1-0으로 앞서나간 뒤 9회초 3점홈런으로 4-0으로 스코어 차이를 벌렸다. 하지만 9회말 3점을 추격당하면서 4-3으로 힘겹게 승리를 거뒀다면?

☞1회초 최초 타점이 승리타점으로 기록된다.

▲B팀이 2-0으로 앞서다 2-3으로 역전당한 뒤 9회초 3점을 뽑아 5-3 재역전승을 거뒀다면?

☞9회초 4번째 점수를 만든 타점이 승리타점으로 기록된다.
양세종은 KBO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의 주전 3루수와 하위타선의 핵으로 활약했다. ⓒ두산베어스

◆KBO 초대 승리타점왕 양세종의 첫 걸음

무엇이든 최초는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1982년 초대 승리타점왕을 차지한 OB 베어스 3루수 양세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82년 4월 5일 청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전. OB 베어스가 창단 후 4번째 치르는 페넌트레이스 경기였다.

베어스는 이에 앞서 3월 28일에 동대문구장에서 펼쳐진 구단 최초 경기에서 박철순의 완투승에 힘입어 MBC에 9-2 승리를 거뒀다.

3월 31일 부산 구덕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두 번째 경기를 치렀는데 0-4로 완패했다.

이어 4월 4일과 5일 청주구장에서 구단 역사상 최초 홈 개막 2연전을 소화했다. 그런데 OB는 4일 MBC전에서 4-5 역전패를 당했다. 개막 이후 1승2패.

(이에 관해서는 책으로도 출간한 [배팬알백-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1> 6편 ‘왜 대전이 아닌 청주에서 원년 홈 개막전을 치렀을까’ 이야기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OB는 4월 5일 일요일 낮경기에서 MBC를 5-3으로 물리치고 2연패를 끊어내고 시즌 2승2패 균형을 맞췄다.

초대 승리타점왕 양세종은 여기서 첫 승리타점을 올리게 된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OB는 1회초 먼저 1점을 내줬지만 1회말 1사 2루서 윤동균의 우전 적시타로 1-1 동점을 만들었다. 3회초 2사 3루서 MBC 백인천에게 적시타를 허용하며 다시 1-2로 뒤지게 됐다.

중반까지는 소강상태. OB는 6회말 3점을 한꺼번에 뽑아내면서 역전에 성공했다.

선두타자 김광수의 볼넷과 윤동균의 우전안타로 무사 1·3루 찬스를 잡은 뒤 4번타자 김우열의 좌전 적시타로 2-2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5번타자 신경식의 좌전안타로 무사 만루 황금 기회를 잡았다.

여기서 이날 6번타자 3루수로 선발출장한 양세종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MBC 두 번째 투수 좌완 유종겸(장충고 2년 선배)을 상대로 우익수 희생플라이를 날려 3루주자 윤동균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OB의 3-2 리드.

OB는 6회말 상대 실책으로 1점을 추가해 4-2로 달아난 뒤 8회 공방에서 1점씩 주고받아 결국 5-3 승리를 거뒀다.

앞서 설명한 승리타점 조건대로 2-2에서 3-2 리드를 잡은 양세종의 희생플라이가 이날의 승리타점으로 기록됐다. 양세종이 개인적으로 프로 데뷔 첫 승리타점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첫 승리타점 거둔 날, ‘트리플 플레이’ 묘기까지

흥미로운 점은 이날 경기 9회초에 양세종이 수비에서 트리플 플레이를 이끌어냈다는 사실이다.

5-3으로 앞서 있는 9회초에 OB는 무사 만루의 절체절명 위기를 만났다. MBC 대타 신언호의 총알 같은 직선 타구가 날아들었다. 이때 3루 선상 수비를 하던 양세종이 점프하면서 타구를 걷어낸 뒤 3루를 밟고 2루로 송구해 주자 2명까지 모두 잡아냈다. 타구 하나에 아웃카운트 3개가 올라가는 보기 드문 끝내기 삼중살이 완성됐다.

하지만 역사적인 KBO 1호 삼중살 기록을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춘천에서 롯데가 삼미를 상대로 1회초에 트리플 플레이를 펼쳤기 때문이다.

OB 베어스 시절의 양세종. ⓒ두산베어스

◆초대 승리타점왕 양세종은 누구?

1964년 창단한 장충고 야구부는 프로야구 출범 이전까지 이렇다 할 전국대회 성적도, 스타플레이어도 내놓지 못했다.

장충고 출신 중 1982년 KBO 원년 멤버가 된 선수도 극히 드물었다.

OB 베어스 외야수 이홍범(1953년생)이 맏형이었고, MBC 청룡의 좌완 에이스 유종겸(1956년생)이 장충고 출신 중 가장 이름 있는 투수였다.

그리고 양세종(1958년생). 연세대를 졸업한 뒤 1981년 실업야구 제일은행에 입단해 1년을 보낸 양세종은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원년에 OB 유니폼을 입었다.

OB 베어스의 주전 3루수이자 하위타선의 뇌관. 팀당 80경기를 소화한 그해 양세종은 76경기를 뛰면서 타율 0.269에 7홈런 37타점을 올리는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원년 홈런 부문에서 김우열(13홈런), 윤동균(8홈런)에 이어 팀 내 3위를 차지할 만큼 필요할 때 큰 것 하나를 기대할 수 있는 펀치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기록이 있었다. 시즌 37타점 중 승리타점만 무려 9개(24.3%)나 수집한 것. 원년에 OB가 56승을 올렸으니 그 중 양세종이 승리타점을 기록한 경기가 16%에 이르렀다.

1982년 승리타점 9개는 원년 6개 구단 타자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 결국 양세종은 이렇게 KBO 원년 초대 승리타점왕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 시절 양세종은 ‘유난히 찬스에 강한 선수’, ‘결정적일 때 부응하는 선수’로 각광 받았다.

양세종은 진화를 거듭한다. 특히 1984년에는 3할대 타율(0.301)에 6홈런, 47타점을 기록하면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해 OB 팀 내 유일한 황금장갑 수상이었다.

하지만 양세종은 1984시즌 후 현역병으로 입대하면서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훈련병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양세종은 군복무 이후 비운의 선수로 전락했다. 전성기에 접어들 무렵 3년간의 군복무가 성장을 막고 말았다. 1987년 OB에 복귀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내지 못했고, 결국 1990년을 끝으로 은퇴를 하고 말았다. 통산 429경기에 출장해 타율 0.270, 27홈런, 199타점의 성적을 남긴 채 유니폼을 벗었다.

그는 은퇴 후 지도자 대신 일반 회사에 들어가 직장인으로 변신했고, 초대 승리타점왕이라는 추억과 발자취도 세월이 흐르면서 야구계와 팬들에게 서서히 잊혀져 갔다. 특히 승리타점이 KBO 공식 타이틀에서 제외됐기에 초대 승리타점 수상자의 이름이 언급될 일은 거의 없었다.

'미스터 OB' 김형석은 1987년 승리타점왕을 차지했다. 베어스 구단은 1982년 양세종에 이어 2번째 승리타점왕을 배출했다. ⓒ두산베어스

◆양세종으로 시작해 김형석을 거쳐 김성한으로 끝났다…'승리타점왕'의 역사

승리타점왕은 1982년부터 1989년까지 7명이 9차례 수상을 나눠가졌다. 초대 수상자 양세종을 시작으로 1983년에는 삼성 이만수(13개)가 트로피를 받았다. 1984년에는 롯데 김용철과 MBC 이광은이 11개의 승리타점으로 역대 유일한 공동 승리타점왕의 역사를 쓰기도 했다.

이만수는 1985년 다시 13개의 승리타점으로 역대 최초로 승리타점상 2회 수상의 주인공이 됐다. 1986년에는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뒤 ‘해결사’로 떠오른 한대화(16개)가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7년에는 OB 김형석(11개)이 영광을 안았다. 그러면서 OB 베어스는 원년 양세종에 이어 최초로 2명의 승리타점왕을 배출한 구단이 됐다.

해태 타이거즈 '오리궁둥이' 김성한은 KBO 4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40인 레전드에 포함됐다. ⓒKBO

해태 간판스타 김성한은 1988년 17개(역대 한 시즌 최다기록), 1989년 15개의 승리타점을 올리면서 2년 연속 승리타점왕을 차지하는 역사를 썼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승리타점은 KBO 공식기록에서 수명을 다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김성한은 최후의 승리타점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KBO 이종훈 기록위원장. ⓒ스포팅제국

◆승리타점은 왜 사라졌을까

승리타점은 앞서 살펴봤듯이 KBO 공식 시상 타이틀 중 가장 먼저 출발한 기록이었다. 1982년 원년에는 투수 4개 부문과 타자 6개 부문 등 총 10개 부문을 시상했다.

그 이후 진화를 거듭해 요즘(2024년 기준)에는 총 14개(투수 6개, 타자 8개) 부문에서 공식 시상식을 한다. 역사적으로 승리타점은 가장 먼저 태어나 가장 먼저 사라진 타이틀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KBO 원년부터 개인 타이틀로 자리 잡은 승리타점이 왜 1989년을 끝으로 폐지됐을까.

KBO 이종훈 기록위원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위원장은 1991년 KBO 공식기록원으로 입사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 기록원. 1980년대에 KBO 공식기록원을 지낸 이들이 모두 현역에서 떠난 상황에서 그도 2025시즌 후면 정년퇴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위원장은 “승리타점은 내가 KBO에 입사하기 전에 이미 폐지된 기록이었다”면서 “1980년대 공식기록지를 보면 ‘홈런 칸’ 밑에 ‘승리타점 칸’이 별도로 있었는데 1990년 이후 공식기록지에도 승리타점 칸이 사라져 별도로 기입하지 않고 있다”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승리타점이 폐지된 가장 큰 이유는 기록의 개수 자체가 적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역대 승리타점 1위를 봐도 10개 안팎이다 보니 표본이 적었고 변별력이 떨어졌죠. 승리타점이라는 게 매 경기 나오는 기록도 아니잖아요. 실책이나 도루, 폭투, 패스트볼, 보크 등으로 결승점이 발생하면 그날 경기에서는 승리타점 기록이 없습니다.”

1982년 팀당 80경기 체제에서 양세종이 9개로 승리타점왕에 올랐다. 현재는 팀당 144경기 체제다. 페넌트레이스에서 우승팀이 6할 안팎의 승률을 올린다는 가정을 하면 대략 87승. 9명이 선발 라인업에 포진하는 야구에서 한 선수가 팀의 시즌 승리타점(결승타)을 20% 정도 쓸어 담기는 쉽지 않다. 87승의 20%를 가져간다고 해도 17.4개에 불과하다.

결승타의 의미를 살려보려는 시도는 있었다. 2024년 포스트시즌에서 그랬다. 농심 신규 브랜드 ‘빵부장’ 출시 기념으로 KBO는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매경기 결승타(승리타점)를 기록한 선수에게 ‘오늘의 한빵’ 시상식을 했다. 부상으로 상금 100만 원과 농심 제공 스낵 5박스가 주어졌다. 그러나 결승타가 기록되지 않아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경기도 발생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이 대표적이다. 우천으로 경기가 중단돼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넘어가 다음날 재개된 경기에서 KIA는 0-1로 뒤지던 흐름을 바꿔 5-1 역전승을 거뒀다. 7회말 2사 2·3루에서 삼성 투수 임창민의 연속 폭투로 1-1 동점과 2-1 역전에 성공했고 결국 5-1로 승리했다. 폭투로 결승점이 나오다 보니 이날 경기의 승리타점 자체가 없었다.

이 위원장은 “승리타점은 행운의 요소도 많이 개입한다”고 덧붙였다. 리드를 잡는 타점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는 있지만, 반드시 가장 중요한 타점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MLB에서도 승리타점에 대해 “이 통계가 보상해야 할 성취를 적절히 구분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고, 1988년을 끝으로 공식기록에서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NPB도 1988년을 끝으로 승리타점을 공식기록에서 제외했고, KBO도 1989년을 끝으로 승리타점 타이틀을 없애고 1990년대부터 최다안타를 신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승리타점은 공식기록에서 제외된 뒤에도 재야에서 '결승타'라는 이름으로 변신해 오늘날까지 야구기록 항목 중 하나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