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이 발탁한 장쩌민, 후진타오로 중공 최초 평화적 권력 교체

베이징=김남희 특파원 2022. 11. 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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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향년 96세로 사망했다.

중국 관영 신화사는 장 전 주석이 30일 오후 12시 30분 상하이에서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 기능 쇠약 합병으로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장 전 주석은 2002년 11월 후진타오(胡錦濤)에게 중국공산당(중공) 최고 권력인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넘길 당시, 1949년 마오쩌둥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후 처음으로 평화적 권력 교체를 이뤄낸 최고 지도자로 평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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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2012년 11월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개막식에 참석했을 당시의 모습. 시진핑 현 중국 국가주석이 당시 중공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선출됐다. /AP 연합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향년 96세로 사망했다. 중국 관영 신화사는 장 전 주석이 30일 오후 12시 30분 상하이에서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 기능 쇠약 합병으로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장 전 주석은 2019년 10월 이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01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이 열린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게 마지막이다. 2021년 7월 1일 열린 중국공산당(중공)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올해 10월 시 주석의 당 총서기직 3연임이 결정된 중공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도 불참했다.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관측이 많았는데,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공개된 적이 없다.

장 전 주석은 2002년 11월 후진타오(胡錦濤)에게 중공 최고 권력인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넘길 당시, 1949년 마오쩌둥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 후 처음으로 평화적 권력 교체를 이뤄낸 최고 지도자로 평가 받았다. 중국 최고 권력자는 중공 중앙위원회 총서기직, 국가주석직, 당과 국가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맡는다. 장 전 주석은 1989년 6월~2002년 11월 중공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맡았다. 1993년 3월~2003년 3월 중국 국가주석을 지냈다. 또 1989년 11월~2004년 9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90년 3월~2005년 3월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장 전 주석은 1980년대 들어 당의 권력 중심에 가까워졌다. 1982년 9월 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됐으며, 1985년 그의 정치적 기반인 상하이시의 시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1987년 중공 제13기 1중전회(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고 상하이시 1인자인 당서기로 임명됐다. 2년 만인 1989년 ‘톈안먼(천안문) 사태’ 후 덩샤오핑에 전격 발탁돼 당 제13기 4중전회에서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총서기로 선출됐다. 1989년 4월 시작된 대학생 주도 민주화 시위는 그해 6월 4일 인민해방군의 수도 베이징 톈안먼광장 유혈 진압으로 끝났다. 당시 덩샤오핑은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유화적 태도를 보인 자오쯔양 당 총서기를 숙청하고 상하이에 있던 장쩌민을 중앙으로 불러올렸다. 중국 관영 신화사는 이날 30일 오후 장 전 주석 서거를 발표하며 장 전 수석이 당 총서기로 선출될 당시의 상황을 “1989년 봄과 여름, 우리나라에 엄중한 정치 풍파가 발생했다”고 표현했다.

장쩌민(오른쪽) 전 중국 국가주석이 2017년 10월 2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이야기하고 있다. /EPA 연합

장 전 주석은 2002년 11월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며 국가 부주석이었던 후진타오에게 당 총서기직을 물려줬다. 당시 그가 권력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으나, 스스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신중국 건국 후 최초의 평화적 권력 이양으로 평가된다. 신화사는 “당의 제16차 전국대표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장쩌민 동지가 당과 국가 사업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또 당과 국가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더는 중앙 지도자 직무를 맡지 않는다고 주동적으로 제기했고, 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났다”며 “(이는) 당과 국가 고층 지도자의 신구 교체를 촉진하는 데 유리하다”고 평했다.

이듬해인 2003년 국가주석직도 후진타오에게 넘겼으나, 군사 권력은 2005년 초까지 쥐고 있었다. 장 전 주석이 후진타오에게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긴 것은 2004년 9월,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긴 것은 2005년 3월이다. 신화사는 “당시 국제 정세는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으며, 국방과 군대 건설 임무를 고려해, 당 제16기 1중전회에서 장쩌민 동지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유임됐다”고 했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수행원의 부축을 받고 있다. 이때가 장 전 주석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이다. /AP 연합

시 주석이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주룽지 전 총리 등 688명으로 구성된 장례 준비위원회를 이끈다. 장 전 주석 별세 소식이 발표된 후 톈안먼 광장과 외국 주재 중국 대사관 등엔 조기가 걸렸다. 신화사와 인민일보 등 중국 관영 매체는 일제히 웹사이트를 흑백 화면으로 바꿨다.

신화사는 “장쩌민 동지는 우리 당과 우리 군, 우리나라 각 민족 인민이 공인하는 숭고하고 위엄과 명망을 갖춘 탁월한 지도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 계급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오랫동안 시련을 겪은 공산주의 전사, 중국 특색 사회주의 위대한 사업의 걸출한 지도자, 당의 제3대 중앙 지도 집단의 핵심, ‘3개 대표’ 중요 사상의 주요 창립자”라고 했다. ‘3개 대표’ 사상은 과거 ‘자본주의의 개’로 비판한 기업가도 공산당원으로 가입시키는 길을 열었다. 중공 역사에서 획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변화로 평가된다. ‘3개 대표’ 사상은 2002년 공산당 헌법인 당장에 포함됐고, 2004년 국가 헌법에 삽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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