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판매금지 일반미 사려 서울 쌀집 곳곳서 ‘007 작전’
쌀에 대한 집착은 배고픔의 산물
정부 단속에도 찰진 일반미 선호
국민음료 커피 뒤엔 냉전의 역사
당시 쌀값 급등으로 인해 박정희 정부가 내놓은 ‘일반미 판매 금지령’이 낳은 ‘웃픈’ 풍경이다. 정부미는 개량종(통일벼)으로 수확량이 많아 값이 쌌지만, 식감이 좋지 않고 수분 함량도 낮아 맛이 떨어졌다. 이에 찰진 식감을 살려 품질은 좋지만 비싼 일반미에 수요가 몰리면서 쌀값이 치솟자 정부가 규제에 나선 것이다. 저탄고지 다이어트가 유행하며 매년 쌀 소비량이 줄고 있는 요즘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30대 중후반의 젊은 연구자 5명이 최근 내놓은 ‘소비의 한국사’(서해문집)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책은 쌀, 술, 커피, 음반 등 다양한 소비재의 내력을 훑으며 한국 현대사를 조명하는 흥미로운 시도를 담고 있다.
정치사나 사회사 위주의 기존 역사서술이 대중들의 삶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미시사, 생활사 연구가 활발하다. 영국 역사학자 메리 비어드가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글항아리)에서 고대 로마 변방도시 주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게 대표적. 공저자 중 한 명인 김재원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강사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를 그린 역사책이 별로 없다는 점에 착안해 동료 연구자들과 집필에 나섰다”고 말했다.
쌀값 오름세에 놀란 박정희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의 4대 도시에서 값싼 정부미만 팔도록 강제하며 서울 시내 70여 개 쌀가게에 단속원을 상주시켰다. 하지만 일반미를 찾는 대중의 입맛을 길들일 수는 없었다. 정부미를 일반미로 속여 팔거나, 쌀값을 올려 받아 정부에 적발된 건수는 1972년 두 달 동안에만 513건에 달했다.
1890년 처음 발명돼 제2차 세계대전 때 본격적으로 소비된 인스턴트 커피는 원두의 진한 향을 담지 못하는 등 품질이 떨어졌지만, 대량생산으로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1972년 국내 인스턴트 커피 150g짜리 제품 값은 750원으로 한 잔에 10원도 되지 않았다(당시 다방 커피 한 잔 값은 50∼60원).
이에 동서식품은 미국뿐 아니라 그 동맹국인 일본, 서독, 이스라엘로부터 자본, 인력, 장비를 각각 지원받아 커피를 선보일 수 있었다. 공저자인 김동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업국가 한국에 커피 제조업 투자를 결정하기는 어려웠지만 냉전시대 의사결정은 경제적 동기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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