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기자]
대한민국 정보화 혁명의 개척자이자 영남 남인 퇴계학파의 학맥을 이어온 행파(杏坡)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가 지난 14일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용태 회장은 1980년 삼보컴퓨터를 설립해 PC 대중화에 기여한 대한민국 1세대 벤처기업가이자, 영남 퇴계학파의 학맥을 이어온 대한민국 유림(儒林)의 지도자이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보기술(IT) 기업 중 하나로 삼보컴퓨터를 키워내 최초의 PC를 개발했으며 서울시 교통신호체계망 구축, 행정전산망 개발 등 지금의 대한민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두루넷도 그가 처음 설립했다.
대학시절 '일타 수학강사'로 명성
고인은 1933년 3월 3일,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아버지 이근화(李根華)와 어머니 영양 남씨 사이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사서오경 등 한학을 공부했다. 이후 영덕농고(현 영덕고)에 진학했으나 6개월 다닌 후 자퇴했다. 고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한 고인은 서울대 물리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학원 수학강사 및 수학 참고서 저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이지흠'이란 이름으로 대입 수학 참고서들을 써냈는데 특히 '수학의 강의', '입시 수학의 분석 연구' 등의 수학 참고서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수학 참고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1950~60년대 대한민국 최대의 입시학원 EMI 학원에서 스타 강사가 되었다.
이후 수학 스타 강사로서의 명성으로 EMI 학원에서 독립해 1965년 서울 종로2가에 제일학원, 대일학원을 세웠고 단기간에 성공했다. 제일학원과 대일학원 경영을 통해 충분한 돈을 마련한 후 학원 운영을 공동창업자들에게 맡기고 1966년 염원했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미국 유타대 대학원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보컴퓨터 설립... 정보화 선각자
한국으로 돌아와 1980년 삼보컴퓨터를 청계천 상가에서 설립해 대한민국 1세대 벤처기업가가 됐다. 당시는 전두환 정부가 국가발전을 위해 컴퓨터, 반도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하던 시기다. 이를 위해 한국의 데이터통신망부터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 적임자가 고인이였다
자본금 1000만원, 직원 7명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설립 6개월 만에 국내 최초의 PC 'SE-8001'을 만들었다. 삼보컴퓨터는 한때 '국민 PC'로 불리며 국내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가정용 PC 시장이 열리자 금성(LG), 현대, 삼성 등 대기업들도 PC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고인은 1996년에는 한국전력과 삼보컴퓨터가 주축이 된 두루넷을 설립했다. 두루넷은 1999년에 나스닥(NASDAQ) 시장에도 상장했다. 한국전력이 설치한 광케이블망과 지역 케이블TV망을 이용해 초고속인터넷을 최초로 서비스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05년 두루넷 관련 부실이 커지면서 삼보컴퓨터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파산하는 부침도 겪었다.
고인은 필자를 만날 때면 늘 "삼보컴퓨터는 두루넷 때문에 망했다. 당시 한전과 인터넷 케이블 사업을 공조했는데, 이후 이게 틀어지면서 회사가 급격히 기울어졌다. 이를 방관한 정부도 원망스러웠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2012년 차남 이홍선 대표가 TG삼보를 인수하며 재건에 나섰다. 현재 TG삼보는 산업용 PC와 공공기관 대상 솔루션 중심의 B2B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약회' 회장... 100만명에 인성교육
이용태 박사는 2005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인성교육 단체인 박약회(博約會)를 중심으로 인성 교육에 매진해 왔다. 후세들을 제대로 가르쳐서 대한민국을 진정한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에서다.
박약은 논어의 ‘박문약례’(博文約禮, 널리 학문을 닦고 예를 지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고인이 박약회와 인연을 맺은 건 삼보컴퓨터가 한창 커가던 1994년 무렵. 초대 회장인 김호길 포항공대 총장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리를 이어받았다. 박약회는 고인이 김호길 총장 등 지인들과 함께 2003년 도산서원의 기숙사인 박약재((博約齋)에 모여 도덕국가를 재현하자는 취지로 만든 모임이다.
유교문화 발전을 위한 유학자들의 모임에서 시작한 박약회는 군인과 학생들을 위한 인성교육 사업과 함께 시골 마을에서 현대식 향약을 실천하는 운동을 해왔다. 그동안 이 단체의 인성교육을 수료한 인원만 100만 명이 넘는다.
퇴계학파 학맥... 마지막 '유림 지도자'
필자는 이용태 박사와 인연이 깊다. 재령(載寧) 이씨 영해파 19대 종손인 고인과는 종친이다. 이문열 작가, 이재오 전 특임장관, 이희범 부영그룹 회장(전 산자부 장관) 등도 재령 이씨 영해파다.
필자가 근무하는 광화문 회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용태 박사의 박약회 사무실(종각역 근처 두산위브 파빌리온)에 들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건물의 순댓국집 등에서 자주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고인은 늘 인자한 미소와 조근조근한 말로 윤리교육의 실종을 안타까워 하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다.
재령 이씨 영해파는 영남 남인 퇴계학파의 학맥을 이어온 문중이다. 영남 남인 퇴계학파의 정통 학맥은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후산 이종수→정재 유치명→척암 김도화→서산 김흥락→석주 이상룡 등으로 이어져 왔다.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의 양대 직계 제자 중 한명인 서애 류성룡은 학봉과는 또다른 퇴계 학맥을 이어왔다.
퇴계 학맥 인물 중 석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가 재령 이씨다. 갈암 이현일은 조선 숙종 때 남인의 영수로서 이조판서를 맡아 서인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치열하게 맞서면서 함경도 유배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오래된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계향의 부친인 안동 장씨 경당 장흥효는 갈암 이현일의 외조부이며, '소퇴계'로 불렸던 한산 이씨 대산 이상정은 밀암 이재의 외손자이다.
이용태 박사는 이런 영남 퇴계학파의 학맥을 이은 마지막 유림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연초까지만 해도 전국 각지를 돌며 강의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고, 지난달 통화에서도 오히려 암투병 중인 필자의 건강을 걱정해 주셨는데 이렇게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가슴이 먹먹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유타대 대학원 이학박사 △유타대 등 한·미·중·러시아 7개 대학교 명예박사 △전 이화여대 교수 △전 건국대 석좌교수 △전 전경련 부회장 △전 도산서원 원장 △전 삼보컴퓨터 회장 △전 두루넷 회장 △전 데이콤 사장 △학교법인 숙명학원 이사장 △퇴계학연구원 이사장 △박약회 회장
※ 이영훈 기자(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