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일론 머스크가 삼성전자와 TSMC 등 기존 반도체 회사에 대한 의존을 거부하고 반도체 직접 생산을 선언했다. 올해부터 내년, 후년 사이에 당장 두 기업의 파운드리 사업부를 위협할 만한 거대한 규모와 수율, 생산 효율을 확보하기는 어렵지만, 테슬라의 부품 수 감축 기조와 함께 완전한 반도체 자립을 이루겠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시장에 던졌다.

▮▮ 파운드리 종속 탈피 선언, 머스크의 250억 달러짜리 승부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지난 3월 텍사스 오스틴에서 선포한 '테라팹(Terafab)' 프로젝트는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선다. 이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 xAI의 생존을 결정짓는 전략적 수직계열화의 정점이자, 기존 파운드리 체제에 대한 선전포고다. 머스크는 TSMC가 수요를 온전히 감당했다면 이 거대한 도박은 없었을 것이라며 공급망 병목이 초래한 심리적 저항선을 드러냈다.

250억 달러가 투입되는 테라팹은 연간 1테라와트(TW)의 연산 출력을 목표로 기가텍사스 북쪽 캠퍼스에 구축된다. 주목할 점은 이 막대한 컴퓨팅 파워의 80%가 지상이 아닌 우주를 향한다는 사실이다. 170미터 길이에 달하는 'AI 샛 미니' 위성 100만 개를 궤도에 올려 태양 광복사 에너지를 직접 활용하는 '오비탈 데이터 센터' 구축이 이 사업의 핵심이다.
지표면보다 5배 높은 태양광 에너지와 우주의 진공 상태를 이용해 열 관리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구상은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결합이기에 가능하다. 머스크는 2027년 말 초기 가동을 거쳐 2029년 본격적인 실리콘 양산에 돌입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이러한 거대 구상의 실현을 위해 머스크는 전통의 제조 강자인 인텔과 손을 잡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 인텔과 손잡은 테라팹, 실현 가능한 야망인가 무모한 도전인가
반도체 제조 경험이 전무한 머스크가 파트너로 인텔을 선택한 것은 미국 내 생산이라는 명분과 최첨단 공정 기술의 결합을 의미한다. 인텔은 18A(1.8나노) 공정 기술과 첨단 패키징 기술을 테라팹에 이식하여 컴퓨팅 파워 공급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계획이다. 인텔 CEO 립부 탄은 이를 제조 기술의 '리팩토링(Refactoring)'이라 정의하며 단순 파트너를 넘어 공급망의 근본적 재설계를 예고했다.

테라팹 프로젝트는 장비 확보를 위해 유례없는 속도전을 전개하고 있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 도쿄일렉트론(TEL) 등 글로벌 장비사들에게 기존 견적을 상회하는 프리미엄 가격을 제시하며 조기 납기를 압박 중이다. "금요일에 요청한 견적을 월요일까지 내놓으라"는 머스크식 몰아치기는 보수적인 반도체 장비 업계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적인 투자와 파트너십에도 불구하고 실제 양산까지는 냉혹한 기술적 검증이 기다리고 있다. 반도체 설계의 천재라 불리는 머스크라 할지라도 제조의 영역은 공학적 지식뿐 아니라 고도의 숙련된 노하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 2나노 공정의 냉혹한 현실, 수율과 기술 장벽이라는 변수
반도체 산업에서 설계와 제조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며, 특히 2나노 이하 선단 공정에서의 수율 확보는 천문학적인 자본으로도 해결하기 어렵다. 과거 삼성전자가 텍사스 팹 건설 당시 지표면 아래 깊숙이 자리 잡은 암반 층으로 인해 초기 3나노 수율이 20%대에 머물렀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질학적 변수 하나만으로도 수조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공기가 지연되는 것이 반도체 제조의 냉혹한 현실이다.

기술적 표준 또한 테라팹의 성공을 가로막는 높은 벽이다. 차량용 및 우주용 반도체는 일반 파운드리 기준인 125도를 넘어 150도 이상의 극한 환경을 견뎌야 하는 AEC-Q100 인증이 필수적이다. 이 25도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트랜지스터와 소재 자체를 완전히 재설계해야 하므로 초기 성공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실제로 테슬라의 차세대 칩인 AI5는 이미 당초 계획보다 2년이나 지연되어 이제야 테이프아웃(Tape-out) 단계에 진입했다. 신규 하드웨어가 나올 때마다 기존 모델이 구형화되는 '비터스위트(Bittersweet)'한 현실은 고객들에게 신뢰의 문제를 던진다. 이러한 기술적 난관으로 인해 기존 파운드리 거물인 삼성전자와 TSMC의 위상은 단기적으로 오히려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 삼성전자와 TSMC의 셈법, 위기보다는 '멀티 파운드리'의 기회
머스크의 자급자족 선언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TSMC는 당장 매출 하락을 걱정하기보다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영리한 대응을 취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테라팹 구축을 도와달라는 머스크의 요청을 기술 유출 방지 차원에서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텍사스 테일러 팹의 생산 물량을 확대하라는 역제안을 통해 22조 8천억 원(약 165억 달러) 규모의 AI6 칩 수주를 확보하는 실리를 챙겼다.

테슬라 역시 특정 기업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TSMC와 삼성전자에 물량을 배분하는 '멀티 파운드리'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테라팹이 본격 가동되기 전까지는 기존 파운드리 생태계의 공정 성숙도와 수율 안정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결국 테라팹이 가동될 2029년까지의 향후 몇 년은 삼성과 TSMC에게 있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각인시킬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재의 시장 구조는 파운드리 업체의 협상력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머스크의 움직임은 기존 시장의 붕괴가 아니라, 빅테크 기업들이 제조 권력을 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존을 예고한다.

▮▮ 제조 권력의 이동, 반도체 자립화가 가져올 미래 산업의 재편
테라팹 선언은 전 세계 빅테크들이 파운드리를 '인플레터블 파트너'에서 '매니저블 서플라이어'로 격하시키려는 거대한 흐름의 신호탄이다. 단기적으로는 삼성과 TSMC에 미치는 위협이 제한적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시스템 기업들이 종합 반도체 기업(IDM)화되는 추세는 피하기 어렵다. 자본력과 설계 능력을 갖춘 기업들이 제조까지 통제하기 시작하면 파운드리 시장의 권력 구조는 근본적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는 이번 변화가 새로운 대형 고객사를 확보할 절호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테라팹이라는 제3의 초대형 팹이 미국에 건설되면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의 수주 잔고는 비약적으로 상승할 전망이다. 다만 제조 기술이 범용화됨에 따라 발생하는 경쟁 심화와 기술 유출 리스크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의 전략적 대응이 절실하다.
결국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화려한 설계 능력을 넘어 안정적인 독자 생산망과 자본 지출(Capex)을 통제하는 기업이 될 것이다. 삼성전자와 TSMC가 현재의 독점적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공정 혁신과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조 권력의 향방은 이제 누가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리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안정적인 공급망을 스스로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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