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이근후 교수가 들려주는 노년기의 지혜

서울문화사 2024. 10. 1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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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100살까지 살아야 한다면 온 힘을 다해 행복하라. 여든아홉의 노학자,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전하는 인생의 철학.

89세 이근후 교수가 들려주는 지혜

백세시대가 도래했다. 몸과 마음이 궁핍하지 않은 노년을 위해선 체계적인 준비가 필수다.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든 후회로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후회해도 내 인생, 만족해도 내 인생이다. 인생의 전반전을 치열하게 싸워온 당신에게 이만하면 훌륭했다고 다독여줄 시간이다. 자신의 노고를 인정해줘야 가벼운 마음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할 수 있다. 50년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지낸 89세의 학자 이근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는 말한다. 다가올 노년기를 구체적으로 준비하되 불안한 마음은 현재의 즐거움으로 달래는 법을 깨쳐야 한다고. 서울 종로구 평창동 소재 집무실에서 마주한 이근후 교수는 90년의 삶을 돌아보며 “기왕 살아갈 인생 소꿉장난하듯이 재밌게 사는 게 전부”라고 전했다. 아흔을 앞둔 인생 선배의 통찰은 깊고 빛났다.

“50년간 상담하며 느꼈습니다”

올해는 선생님에게 의미가 남다를 거 같습니다.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의 개정판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제목처럼 남은 인생을 유쾌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웃음)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을 수록한 책이에요. 집필할 때는 한 개인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누가 읽어줄까 싶었는데, 사람들이 사는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 같았어요. 인생에서 직면하는 고민이나 후회, 기쁨과 성취를 느끼는 순간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갖고 개인적인 경험을 써 내려갔습니다.

노년기가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할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인생을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기 때문에 불안하고 막막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아흔 해를 살아본 저의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60살이 되던 해에 생각했어요. 살아온 궤적을 돌아보니 경험이 없어서 성공도 실패도 닥치는 대로 겪으며 살았더군요. 그때까지 쌓은 건 나의 데이터고, 정리된 내용을 갖고 남은 인생 2막을 잘 살아봐야겠다 싶었어요. 전반전을 겪었으니 앞으로 남은 후반전은 크게 어렵지 않을 거 같았습니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인생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을 맞이했듯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자신만의 삶의 법칙을 찾길 바랍니다.

노년기를 유쾌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뭔가요?(웃음)

정답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년 이후의 삶을 쓸모없다고 여깁니다. 생산성이 떨어진 본인 모습에 점점 위축되고, 웃음까지 잃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묻는다면 내 인생을 온전히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겨우 손에 넣은 자유의 시간입니다. 그런 귀한 시간을 만끽하지 못하고 타인의 눈치를 보고 좌절하면서 살면 아깝지 않겠어요?

"누군가 제게 요령껏 잘 사는 방법을 묻는다면 일상에서 잘 참고,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떨면 된다고 처방해주고 싶어요.
눈이 쌓이기 전에 쓸어버리듯 마음속 노여움을 쓸어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근후 교수는 2011년 76살 나이로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학과에서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며 “꿈을 이루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는 즐겁고 기쁜 날, 슬프고 서러운 날보다 비슷비슷한 날이 더 많다. 이근후 교수는 그런 일상에서 재미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어차피 100년을 살아야 한다면 살아갈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인생 지론이다.

백세시대라고 합니다.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가치 있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나의 가치를 잃어선 안 되고,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노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탑재돼야 합니다. 노인이 가진 조건 중에 유리한 게 많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슬픈 일이 더 많죠. 하지만 그럼에도 가치 있는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여러 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에요. 인생에서 습득한 지식과 경험이 나의 역량이고 능력입니다. 자신이 일궈온 소중한 자산을 바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좇아 살다 보면 행복에 가닿게 될 거예요.

선생님은 어떤 가치를 좇으며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스마트(SMART)하게 살기로 계획했습니다. 스마트의 영어 알파벳을 따서 S(Simple), M(Movement), A(Artistic), R(Rest), T(Together)라는 저만의 삶의 방향을 만들었어요. S는 단순함이에요. 나이가 들면 감정과 사고 모두 복잡해져요. 여기에 감각까지 둔해지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면 쓸모없는 물건을 정리하듯 쌓인 감정을 해소해 정서적으로 심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이롭다고 판단했습니다. M은 움직임이에요. 노인이 될수록 체력 보강을 위해 많이 움직여야 해요. A는 ‘예술적인’이라는 형용사의 머리글자로, 정서를 잃지 말자는 의미에서 붙였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정서적 감각이 무뎌지는 경우가 많은데,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선 무언가를 보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길 멈춰선 안 돼요. R은 일하는 것만큼 쉼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합니다. 요즘은 휴가를 떠나서도 일을 하는데, 의학적으로 쉰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해요. 기계로 치면,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이죠. 쉴 때 제대로 쉬어야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끝으로 T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함께’라는 개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였어요. 아무리 혼자 사는 인간이래도 관계를 맺으면서 살게 돼요. 나이가 들수록 타인과 무언가를 나눌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축복은 없을 겁니다.

노년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나요?

자신의 분수를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지요.(웃음) 사람에겐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해요. 실버타운에 가면 여성은 금방 커뮤니티를 만들어 관계를 쌓는 반면, 남성은 그렇지 않아요. 사회에서의 지위와 명예만 생각하면서 여전히 목에 힘을 주고 지내는 것이죠.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까워요. 실버타운에서 시작된 새로운 인생을 인정하지 못하면 결국 스스로 비참해집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일상에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하자면 수다가 특효약이에요. 수다를 떠는 행위만으로 속이 후련해져요. 의학적으로 수다는 재반응의 효과가 있어요. 쉽게 설명하면 안에 묵혀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떨쳐내는 것이죠. 누군가 제게 요령껏 잘 사는 방법을 묻는다면 일상에서 잘 참고,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떨면 된다고 처방해주고 싶어요. 눈이 쌓이기 전에 쓸어버리듯 마음속 노여움을 쓸어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요.

반대로 노년이 괴로운 이유는 뭘까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뗄 수 없는 감정이지만, 과도해서 좋을 게 없어요. 후회한다고 해서 과거는 바뀌지 않고, 걱정한다고 해서 벌어질 일을 막을 순 없으니까요. 가장 치명적인 건 후회와 불안은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이런 감정들로 잠 못 이루는 이들에겐 후회해도 내 인생이고, 만족해도 내 인생이니 전부 수용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늙는다는 자체가 슬픔이기도 합니다.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해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똑같이 부여된 인생, 개인이 선택한 능력대로 사는 거예요. 세상에는 능력보다 더 많은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능력이 있어도 안 하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제각기 다르지만, 큰 틀에선 다르지 않아요. 모두 유아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중년을 거쳐 노년이 돼요. 절대적인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그러니 나의 늙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자신감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지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자신감이라고 합니다. 저를 찾아왔던 수많은 환자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저는 묻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냐?”고요.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자기 사랑법을 배워야 해요. 이기심을 뛰어넘는 이타심, 이타심을 뛰어넘는 이기심이라고 하는데 쉽게 설명하면 어느 정도 이기심이 있어야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먼저 내 삶을 돌볼 수 있어야 타인을 도울 여력이 생기는 겁니다. 즉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세상을 움직일 힘이 생깁니다.

사회에서 노인이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드는 것도 문제입니다.

노인의 고립은 자연적인 순리예요. 개울이 흘러 개천이 되고, 개천이 흘러 강이 되는 순리와도 같아요. 그러니 인생에 찾아온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힘을 길렀으면 좋겠어요. 교수로서 마지막 강연을 하던 날, 학생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여러분의 선생이었지만, 앞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시간도 줄고 이해력도 점점 떨어질 테니 여러분이 나의 선생이 될 거라고. 새로운 지식을 쌓게 되면 부디 나를 불쌍하게 여겨 알려달라고 했습니다.(웃음) 오랜 경험을 통해 내뱉을 수 있었던 진심입니다. 퇴직 이후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했어요.

이근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50년간 15만 명 이상의 환자를 돌보며 행복한 삶에 대해 연구했다. 국내 최초로 폐쇄적인 정신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었고, 정신 질환 치료법으로 사이코드라마를 도입한 장본인이다. 퇴임 이후에는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해 청소년, 부모, 가족, 노년 등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을 진행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지혜를 전파했다. 지난 40년간 작가로도 활동해온 이근후 교수의 저서로는 <살 만큼 살았다는 보통의 착각> <괜찮아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드는 법> 등이 있다.

기획 : 하은정 기자 | 취재 : 이보미(프리랜서) | 사진 : 이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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