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품에 수도 없이 안긴 아내…알고도 미소짓는 남편 있었다고? [히코노미]
[히코노미-7] 매일 밤 아내는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입니다. 가족 외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준비를 마친 아내가, 남편과 가볍게 뺨을 맞댑니다. “다녀올게요.” 남편의 표정은 씁쓸합니다. 아내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은 자신의 ‘상관’. 남편의 출세를 위한 ‘미인계’였던 셈입니다. 고관대작을 염원한 그는 아내의 외도를 눈감았습니다.
랜돌프 처칠과 그의 부인 제니 제롬의 이야기입니다. 어디인지 낯이 익은 성. 맞습니다. 이 막장 부부의 아들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경제사를 다루는 히코노미에 웬 정치인이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화’라는 경제적 충격파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경제는 언제나 미시적 삶의 실타래를 흔들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기도 합니다.
19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였습니다. 미국 아메리카 광활한 대륙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물품과 황금빛 곡물들이 유럽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세계화의 파고는 취약한 계층부터 닥친다지만, 때론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1800년대 잉글랜드 귀족들이 세계화 유탄을 그대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1840년 급변합니다.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대기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풍경들. 감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던 민중들. 당시 총리였던 로버트 필은 지시합니다. “곡물법을 폐지하고 농작물을 값싸게 수입하겠다.” 당시 지식인 계층의 필독서였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역시 자유무역에 힘을 실었습니다.
무역의 장벽이 무너지자, 곡물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아사(餓死) 직전 아일랜드 사람들에겐 작은 빛이었으나, 잉글랜드 귀족과 농민에겐 거대한 그림자였습니다. 곡물 가격이 폭락하면서였습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귀족 작위를 유지하고 있던 처칠 가문(말보로 공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대서양에서 남루한 귀족에 손을 내밀 구원자가 도착했습니다. ‘달러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미국의 부잣집 딸들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걸출한 경제 거물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철도·철강·석유·백화점 등 거대한 산업이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이끌던 시절입니다. 막대한 부에도 이들의 허영은 차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교계 상류층에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올드머니(Old Money)로 불리는 오랜 전통의 부자들은 이들을 “벼락부자”로 폄훼합니다. 유럽 귀족 출신으로서 오랜 세월 미국에 터를 잡은 이들만이 진짜 ‘상류’가 될 수 있었습니다. “Money can’t buy the class(돈으로 계급을 살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미국에서 온 부잣집 규수들은 영국 귀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지적 수준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데다가, 신대륙 특유의 발랄함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남성 앞에서도 당당히 매력을 과시하는 모습에 점잖은 귀족들마저 쉽게 매료됩니다. 거기에 엄청난 재산은 또 어떻고요.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7세는 미국에서 온 여성 손님들을 만나는 걸 열렬히 즐겼을 정도입니다.
잉글랜드 귀족 열 중 하나는 달러 공주와 결혼합니다. 가장 높은 계급인 공작(Duke) 서른개 가문 중에서 여섯개 가문이 ‘달러공주’와 결혼했을 정도였습니다. 귀천상혼을 금기로 여기던 영국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전 유럽으로 범위를 넓히면 450건이 집계됩니다. 세계화의 파고가 그린 역설적 풍경이었습니다.
사탕수수로 큰돈을 모은 미국 사업가 안토니오 이즈나가도 딸을 맨체스터 공작 집안에 시집보내면서 1억 3000만 달러를 지급해야 했습니다. 미국 부자들의 ‘신분 콤플렉스’를 여실히 드러내는 액수입니다.
랜돌프와 제니가 닦아놓은 길에, 아들 윈스턴도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 주요 요직을 가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군대에 입대하지요. 처칠은 직접 쿠바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싶어 어머니 제니의 힘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뉴욕, 쿠바, 인도를 누비면서 윈스턴은 세계의 정세를 읽는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세계화라는 파고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윈스턴은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정계에서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보수당은 그러나 세계화에 반감이 있었지요. 세계화로 폭락하는 곡물값이 귀족들의 경제적 몰락을 초래한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습니다.윈스턴은 소장파로서 당에 반기를 들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윈스턴이 적을 옮겨 자유당 정치인으로 20년이나 있었던 배경입니다.
유일하게 항복하지 않았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윈스턴 처칠이 있었습니다. 전임 총리 네빌 체임벌리가 히틀러에 신뢰를 드러낼 때도 그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1940년 5월 신임 ‘총리’ 윈스턴 처칠은 말합니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하늘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 땀, 눈물 뿐입니다.” 전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명연설이었습니다.
4년 후, 억압받는 피식민 국가들 대다수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은 승리를 향한 그의 집착, 미국 참전에 대한 그의 믿음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나를 좋게 평가할 것입니다. 내가 바로 역사를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 처칠은 언제나 자신을, 조국을, 역사의 진보를 믿었습니다. 확고한 신념 속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꾸준히 나아갔지요. 아버지의 나라 영국의 엘리트주의와 어머니의 나라 미국의 개척정신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세계화의 파고는 영국의 귀족을 무너뜨렸지만, 윈스턴이라는 거물을 낳았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격언, 역사를 설명하는 데 탁월한 문장입니다.
ㅇ19세기 세계화가 지속되면서 곡물가격 하락으로 영국 귀족들의 파산이 속출했다.
ㅇ이때 미국의 신흥 부자들의 딸들이 몰락한 영국 귀족들에게 시집가기 시작했다. ‘고귀한 신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ㅇ‘달러 공주’라고 불린 이들 중 한 명이 ‘제니 제롬’. 그녀는 이 결혼으로 아들 윈스턴 처칠을 낳았다.
ㅇ처칠은 어머니의 나라 미국에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끈질기게 요청해 결국 이를 받아냈다. 세계화가 만든 비극이 희극으로 바뀐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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