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지 못했던 ‘모자왕국’ 조선은 왜 모자에 꽂혔을까?

조선시대 사극을 떠올려보자. 외출한 양반들은 늘 갓을 쓰고, 집에서도 대감들은 삐죽삐죽 산봉우리 모양에 시스루(See-through)처럼 비치는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있다. 저잣거리의 상민들은 패랭이를 쓰고 다닌다. 기다란 쓰개치마로 머리를 가리고 다니는 여인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열 사람이 모이면 아홉이 다른 모자를 쓰고 있는 나라. 조선은 모자 천국, 모자 왕국이었다. 역사 연구가 이승우 씨가 최근 펴낸 책 《모자의 나라 조선》를 통해 지금까지 보지 못했거나, 또는 잊고 있었던 수많은 조선의 모자를 들여다보자.

“조선은 가장 독특한 모자 문화를 지닌 나라다. 모자에 관해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조언을 해주어도 될 만큼 수많은 종류의 모자를 만드는 모자 천국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에 들어와 고종의 공식 초상화를 그렸던 프랑스 화가 조제프 네지에르(1873~1944)가 남긴 말이다.
앞서 조선을 찾은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빌 로웰(1855~1916)은 저서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조선인은 모자를 명예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긴다. 집안에 들어갈 때 신발은 벗고 들어가지만, 모자만은 꼭 쓰고 들어간다. 식사 중에도 편한 차림을 위해 겉옷은 벗어도 모자만은 쓰고 식사를 한다”고 기록했다.
조선이 모자 왕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도 있다. 1894년에서 1901년 사이 조선에서 살았던 스코틀랜드 여성화가 콘스탄스 테일러가 1904년 발간한 《조선의 일상(Koreans at Home)》에 실린 〈서울 풍경〉이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인 육조거리에서 그린 이 한 장의 풍경화에는 오가는 행인들이 쓰고 있는 쓰개(모자)만 해도 사모, 갓, 초립, 패랭이, 방갓, 장옷, 쓰개치마 등 일곱 가지나 볼 수 있다.

상투문화와 존두사상

조선은 왜 모자 왕국이 되었을까. 조선의 모자는 상투문화에서 비롯됐다. 유별나게 머리를 중시하는 존두사상(尊頭思想), 여기에 선비의 의관정제(衣冠整齊) 의식, 성리학의 윤리관, 계급사회 체제가 영향을 끼쳤다.
상투는 한자어 상두(上斗)에서 나온 말로 상두는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머리에 북두칠성을 얹었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상투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여겼다. 황하문명보다 1000년 앞선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은 고조선 문명의 전단계다. 여기서 상투를 고정하는 옥고(玉箍)가 다량 출토됐다. 옥고는 중국 내륙과 남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상투가 동이족의 고유한 머리 양식이기 때문이다.

조선 모자는 “정체성”

조선 모자의 뿌리는 이처럼 고조선의 상투와 닿아 있다. 이 오랜 관습이 조선 성리학과 융합해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조선 양반들은 상투가 관모 밖으로 비치지 않도록 상투 위에 상투관이라는 또 하나의 작은 관모를 착용한 뒤 탕건과 갓을 썼다.
조선 조정은 국가 질서를 조속히 안정시키고자 신분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며 백성들의 복식(服飾)까지 일일이 간섭했다. 지배계층은 양반과 중인, 피지배계층은 상민과 천민이었다. 상민은 농업,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말하며, 천민은 노비, 광대, 무당, 백정, 기생, 물꾼, 걸인 등이다. 신분제도의 목적은 신분 차별이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이 옷과 모자, 즉 의관(衣冠)이다. 조선 조정은 신분에 따라 써야 할 모자와 쓰지 말아야 할 모자를 엄격하게 강제했다.
조선 모자문화는 계급사회라는 강고한 체제 아래서도 미의식을 버리지 않았던 조선 민중들의 열망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모자로 진화하며 꽃을 피워 나갔다.

다양했던 조선 모자들

조선에는 어떤 모자가 있었을까. 먼저 왕의 관모로는 면류관, 원유관, 익선관, 통천관, 죽전립 등이, 왕비는 적관, 주취칠적관 등이 있었다. 궁중 의식용으로는 각건, 진현관, 개책관, 아광모, 오관, 화화복두, 가동용 초립 등이 쓰였다.
문관용 관모는 양관, 제관, 복두, 사모, 백사모 등이고, 무관용 투구는 첨주, 원주, 면주, 간주, 두석린, 두경, 등두모 등이다. 선비용도 다양하다. 초립, 흑립, 옥로립, 백립, 정자관, 동파관, 충정관, 장보관, 방관, 망건, 감투, 유건, 효건, 굴건, 휘항, 이엄 등을 적절히 썼다. 중인들은 유각평정건, 무각평정건, 오사모, 조건, 방립 등을 사용했다.
여성은 예장용으로 화관, 족두리, 가리마, 전모를, 방한용(난모)으로 남바위, 조바위, 아얌, 풍차, 볼끼, 내외용으로 면사, 개두, 너울, 장옷, 쓰개치마, 처네 등을 애용했다. 서민들은 갈모와 패랭이를 만들어 썼고, 천민층은 벙거지, 삿갓, 패랭이를 이용했다.

쓰개, 조선을 떠나다

그런데 이처럼 많던 조선의 쓰개(모자)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뭘까. 1884년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과 1895년 내려진 단발령(斷髮令) 탓이다. 조선 내 소요를 격발시켜 군대 파병을 노린 일본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상투를 자르라는 칙령은 갓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갓을 버린다는 것은 양반이라는 신분과 문명인이라는 자긍심, 자아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상투를 틀지 않으므로 상투를 가리던 망건과 탕건, 갓을 쓰는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망건과 탕건이 없는 곳에 갓은 머물 수가 없었고, 더 머물 이유도 없었다. 누구도 갓을 쓰지 않자 사람들은 갓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갓과 조선의 모자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모자 왕국의 귀환

서양인들이 이미 인정했듯이 조선이 모자 왕국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대한민국은 어떨까? 아는 이가 많지 않겠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독보적인 모자 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이 땅에서 한민족이 만들어 한민족만 쓰던 모자를 이제는 세계인들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모자 회사인 「영안모자」, 「유풍실업」, 「피앤지코퍼레이션」은 세계 3대 모자 제조업체이다. 이 가운데 「영안모자」는 1980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스포츠 모자 시장에 진출하여 단번에 세계 1위 업체로 올라섰다. 모자 공급량에서 세계 1위인 「유풍실업」은 ‘Flex-Fit’이라는 자사의 고유 브랜드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가장 후발주자인 「피앤지코퍼레이션」은 미국의 4대 프로 스포츠인 NBA(전미 농구협회), MLB(메이저리그 베이스볼), NFL(미국 프로풋볼리그), NHL(북미 프로아이스하키리그)에 속해있는 130개 구단과 NCAA(미국 대학 스포츠협회)에 소속된 약 300여 개의 대학팀에 스포츠 모자를 공급하여 명실공히 이 분야의 선두 공급자이다.

이처럼 한국의 모자가 30년 이상 세계 시장을 석권하며 고급 모자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것은 혹시, 과거의 기억들 즉 모자 왕국, 조선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들이 한국인에게 집단 유전된 것은 아닐까? 거북선과 현재 한국의 조선업처럼 말이다. 아니면 우연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더라도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기술이 아니던가?


이규열(본지 발행인 겸 편집인)
[참고도서] 모자의 나라 조선 | 이승우 | 주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