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막과 동시에 멈췄다. 지난 시즌 트레블을 달성했던 디펜딩 챔피언 현대캐피탈이 KOVO컵을 도중에 접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뛸 수 있는 선수가 8명 남짓, 리베로도 사실상 없었다. 대표팀에 차출되거나 예비 명단에 오른 선수, 부상자, 그리고 외국인 선수까지 모두 못 뛰게 되면서 전력 구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상태로 경기를 강행하면 포지션을 억지로 바꿔야 하고, 그러다 다칠 위험이 커진다. “팬들에게 정상적인 경기를 보여줄 수 없다”는 구단의 말은 핑계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번 파행의 뿌리는 국제 규정과 일정에 있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세계선수권 기간엔 대회를 열지 말라고 못을 박아왔다. 세계선수권이 끝난 뒤 3주를 쉬고 각국 리그를 시작하라는 원칙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KOVO는 컵대회를 “친선 성격의 이벤트”로 보고 강행했다. ITC(국제이적동의서)도 “정규리그가 아니니 굳이 받을 필요 없다”는 판단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 여러 구단이 “나중에 큰일 난다, 절차대로 가자”고 경고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문제 없다”였다. 그리고 대회 코앞에서 FIVB의 제동이 걸렸다. “외국인·외국 팀 불가, 세계선수권 등록·예비 명단 선수 불가, ITC 발급 제한”이라는 조건부 승인. 이 조건을 적용하면 현대캐피탈은 선수 숫자가 모자랐다. 결과는 중도하차였다.

팬들의 입장에서 보자. 표를 사서 멀리 여수까지 갔는데, 경기 취소·연기 소식이 오락가락했다. 초청팀은 빠졌고, 외국인 선수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남은 일정은 무료 입장으로 돌린다지만, 팀이 둘이나 빠진 ‘반쪽 대회’에서 제대로 된 경기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스폰서, 개최 도시, 중계 파트너도 타격을 받았다. 리그의 신뢰는 이런 작은 균열에서 무너진다. “또 이런가 보다”라는 체념이 쌓이면, 관중은 돌아오지 않는다.
현대캐피탈만의 불운도 아니다. 국가대표와 예비 명단 규정이 적용되면 어느 팀이든 구멍이 생긴다. 현대캐피탈은 특히 리베로가 비었다. 주전 리베로는 대표팀, 대체 리베로는 예비 명단. 결국 리베로 없이 경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배구에서 리베로는 수비의 심장이다. 이 포지션을 빼고 경기를 치르라는 건, 자동차에서 브레이크를 떼고 달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선수 보호를 이유로 하차를 택한 결정은 비겁함이 아니라 상식에 가깝다.

핵심은 절차다. 국제 일정과 충돌하는 구간은 ‘빨간색’으로 잠그고, 승인 없이는 대회나 이벤트를 발표하지 말아야 한다. 승인 요청-중간 회신-최종 승인의 마감일을 역산해, D-30까지 서면 승인이 없으면 자동 연기하는 규칙이 필요하다. ITC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서류”가 아니라 “받아야 하는 허가”다. 외국인·아시아쿼터를 쓰는 대회라면 더더욱 그렇다. 또한 위기 대응도 표준화해야 한다. 중단·연기 상황이 생기면, 현장 방송 멘트·전광판 문구·앱 푸시·문자 발송·현장 안내 인력 투입·환불 절차까지 ‘한 장짜리 매뉴얼’로 바로 실행해야 한다. 팬이 가장 싫어하는 건 “왜 그런지 모른 채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번 일은 “컵대회는 가벼운 이벤트”라는 오래된 인식도 흔든다. 상금이 있고, 스폰서가 붙고, 지난 시즌 트레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대회를 ‘친선’으로 부를 수 있을까. 시즌 전력 점검의 가치는 더 크다. 세터와 공격수 호흡, 리시브 라인 점검, 신인 테스트, 전술 카드 확인… 이 모든 걸 컵대회에서 한다. 그런데 국제 규정을 무시한 채 진행했다가, 정작 가장 준비가 필요한 팀이 가장 큰 손해를 봤다. 리그의 목표가 “국제 경쟁력”이라면, 리그 운영부터 국제 기준을 지켜야 한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팬도 선수도 믿지 않는다.

여자부는 괜찮을까. KOVO는 “여자 대표팀이 세계선수권에 나가지 않아 여자부는 문제 없다”고 설명하지만, 이미 팬들은 흔들렸다. 남자부 파행을 보고 난 뒤의 여자부 개막은 “괜찮다”는 말만으로 안심되지 않는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손봐야 한다. 첫째, 국제 일정과 규정 준수 전담팀을 둔다. 둘째, 모든 대회는 FIVB/AVC 서면 승인 없이는 ‘발표 자체’가 불가하도록 내부 규정을 고친다. 셋째, 구단에게 ‘보류권’을 준다. 승인 불확실 구간에선 구단 합의로 대회를 멈출 수 있어야 한다. 현장의 경고를 제도화해야 “수십 번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는 말이 사라진다. 넷째, 팬 보상 원칙을 명확히 한다. 돌발 취소·연기 시 환불+대체 프로그램(공개 훈련, 사인회, 유스 클리닉 등)을 즉시 가동한다.
현대캐피탈의 중도하차는 아쉽다. 하지만 더 큰 부상과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한 브레이크였다고 본다. 이 결정이 “팀만 살았다”로 끝나면 안 된다. 리그가 배워야 한다. 규정은 “해석”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을 지키면 사고는 줄고, 팬은 돌아온다. 이번 파행의 책임은 변명으로 덮을 일이 아니다. 달력부터 고치고, 절차를 세우고, 현장을 존중해야 한다. 그게 리그가 팬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다. 그리고 신뢰는 경기력보다 만들기 어렵고, 한 번 잃으면 경기력보다 되찾기 더 어렵다. 이번엔 정말,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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