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작성자 구속에 의사들 '발끈'…내부선 '자성론' 나와
의사단체들 잇따라 성명…"표현의 자유 억압", "블랙리스트는 저항 수단"
"부끄러워해야" 자성 목소리도…피해자 "범죄행위를 '의사 죽이기'로 물타기"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성서호 기자 = 이른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작성·유포해 구속된 사직 전공의를 두고 의사 사회가 전공의 '탄압'이라며 두둔하는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이 해당 전공의를 면회한 뒤 돕겠다고 나섰고, 다른 의사단체들은 전공의가 인권유린을 당했다며 집회를 열거나, 블랙리스트를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성명을 잇달아 냈다.
의료계에서도 블랙리스트 유포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기는 하지만 많지 않다. 블랙리스트 유포로 피해를 본 한 의사는 범죄행위를 '의사 죽이기'로 물타기 하는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의협회장 "유포자=피해자"…의사단체 "블랙리스트는 저항 수단"
22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전공의 집단행동 등에 참여하지 않은 의사들의 신상 정보를 담은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게시한 사직 전공의 정 모 씨가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뒤 의료계는 '구속 전공의 구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구속 다음날인 21일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정씨를 면회한 뒤 취재진에게 정씨를 '피해자'로 지칭하면서 "철창 안에 있는 전공의나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당한 전공의나 그 누구라도 돕겠다는 게 협회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구속된 전공의와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분들 모두가 정부가 만든 피해자"라며 "정부가 의사들 사이를 다 결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기도의사회는 전날 서울 이태원 인근에서 '전공의 구속 인권 유린 규탄'을 주제로 집회를 열었다. 블랙리스트를 유포한 전공의를 구속한 것을 '인권 유린'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이 단체는 "투쟁과 의사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 요소이고, 이런 정도의 소극적 의사 표현조차 말살하는 것은 북한 수준의 인권 유린"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의사회 역시 성명에서 블랙리스트 유포를 "정부의 초법적 조치에 대한 저항 수단"이라고 표현했다. 이 단체는 "앞에서는 대화를 청하면서 뒤로는 검경을 통해 겁박하는 것이 현 정부의 행태"라고 비판했다.
전라북도의사회는 성명을 통해 "'의료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노력해 온 의사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행위를 범죄로 몰아가는 공안 통치의 전형으로,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의사 사회 자성론 크지 않아…피해 의사 '대인기피증'까지 겪어
블랙리스트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만 의사 사회 내부에서 자성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강희경 서울대 의과대학·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논란이 된 블랙리스트 사이트와 관련해 지난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의사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배포하시는 분들은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며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전공의들의 사직이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의심하게 한다"고 적었다.
이어 "당신들의 행동이 정부의 폭압과는 다르다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라며 "의사 집단을 범죄자 집단으로 여겨지게 할 뿐이며 다른 이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닫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21일에는 정 모 전공의의 구속을 '의정갈등 첫 구속 사례'라고 표현한 기사를 링크하며 "의정갈등 첫 구속? 온라인 집단 괴롭힘 가해자의 구속이 아니고?"라고 적으면서 "적법한 구속이기는 한 것일까?"라고 우려했다.
노환규 전 의협 회장은 전날 페이스북에 "정 모 씨의 행동은 그 취지가 마녀사냥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언급하면서도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없는데도 구속한 것이라는 문제 제기에 방점을 둔 글을 올렸다.
의사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구속된 전공의를 두둔하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오며 그를 돕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블랙리스트 유포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해자를 돕자는 목소리만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익명의 한 의사는 "의사 커뮤니티는 기울어진 운동장 같다. 블랙리스트에 동조하며 제보하는 식의 목소리가 다수며 (블랙)리스트에 올라온 사람은 숨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의 피해자 중에서는 자신의 신상이 공개돼 대인기피증을 겪는 경우도 있다. 서울 소재 병원에 파견된 한 군의관의 경우 이름이 공개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병원 측에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랙리스트에 피해를 본 한 의사는 연합뉴스에 "(의사들 사이에서) 정부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저항하려면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이 많다"며 "범죄 행위가 소명돼서 구속한 것일 텐데,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법당국이) '의사 죽이기'로 시범 케이스를 만든 것이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블랙리스트, 전공의·의대생서 응급실 의사까지 확대…대화 국면마다 소통 막아
이번 의정 갈등 상황에서 블랙리스트는 정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며 복귀나 대화를 요청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등장해 의료계 내의 소통을 막아 왔다.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막으며 의정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에 걸림돌이 돼 왔다.
이번 전공의 집단이탈 상황에서 처음 블랙리스트가 등장한 것은 지난 3월 초다.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은 전공의들의 신상이 '참의사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의사 인터넷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에서 공개됐다.
미복귀자에 대한 처벌이 가시화되던 지난 6월 말에는 같은 커뮤니티에 복귀 전공의뿐 아니라 복귀 의대생, 전공의 자리를 메우는 전임의(펠로) 등의 명단이 담긴 '복귀 의사 리스트'가 나왔다.
다음 달인 7월에 정부가 전공의들에 대한 처분을 철회하면서 의료현장 복귀를 유도하자 이번에는 '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텔레그램 채팅방이 만들어져 의료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의 신상을 공개했다. 이번에 구속된 전공의는 이 블랙리스트를 공개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 위기가 커지는 가운데 응급실에서 근무 중인 의사의 명단까지 포함한 블랙리스트가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텔레그램 채팅방, 아카이브 사이트 등으로 공개 경로를 옮기고 전공의에서 전임의(펠로), 의대 교수, 공무원과 기자 등으로 대상이 넓어지더니 응급실 근무 의사들의 명단까지 공개하며 이탈을 압박한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의사들에 대해서는 실명 외에도 "불륜이 의심된다", "모자란 행동",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 "래디컬 패미니스트", "사이코 성향" 등의 악의적인 표현이 달렸다.
정부는 "블랙리스트는 환자 곁을 지키는 의료진들에 대한 조롱과 모욕이며, 개인의 자유의사를 사실상 박탈하는 비겁한 행위"(지난 12일 한덕수 국무총리)라며 엄정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복지부는 지난 18일 그동안 블랙리스트를 유포하거나 의사 커뮤니티에서 근무 중인 의사를 공개 비방한 43건을 수사 의뢰했고, 수사 기관이 32명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bkkim@yna.co.kr, s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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