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해온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전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가전 교체 주기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중국 업체들의 매서운 추격까지 더해지면서 가전 종주국 지위까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숫자로 나타난 가전 신화의 붕괴
30일 가전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VD) 및 생활가전(DA) 사업부문의 영업이익은 2024년 1조7000억원에서 지난해 -2000억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분기별로 보면 지난해 3분기 -1000억원, 4분기 -6000억원으로 2분기 연속 적자다. 2023년 3분기(-500억원) 이후 2년여만의 영업손실이기도 하다.
글로벌 가전 시장 수요약화에 중국 기업의 거센 공세에 실적이 추락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 중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수년 넘게 넘버원(No.1)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TV가 이제는 중국에 판매량 뿐만 아니라 기술력에서도 밀릴 가능성이 나타나면서 위기감이 눈 앞에 닥쳤다.
중국 TCL·하이센스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저가 시장을 점령하면서 삼성·LG전자는 프리미엄 라인업으로 낮은 출하량에도 높은 매출 점유율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이 초대형 및 고화질로 승부하던 우리나라의 기술력을 빠르게 따라잡으면서 일각에서는 이미 ‘역전됐다'는 평가까지 내놓는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에서 이런 상황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130인치 마이크로 RGB(적녹청) TV를 공개했는데, TCL은 33인치나 더 큰 163인치 마이크로 LED TV로 압도했다. 하이센스도 150인치 레이저 TV로 삼성전자를 눌렀다.
또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여파로 현지에서 판매 중인 제품들의 수익성이 낮아진 것도 국내 가전업체들의 적자의 원인 중 하나다.
TV 등 생활가전을 미국에 수출할 경우 상호관세(국가별 관세) 15%와 함께 가전에 쓰이는 철강에 대한 50% 품목관세도 내야 한다. 냉장고나 세탁기 등 대형 가전의 원재료에서 철강이 차지하는 비중은 30~40% 수준이어서 관세 영향을 크게 받는다.
더욱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15%에서 25%로 인상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올해 생활가전의 수익성은 더욱 악화될 공산이 크다.

LG전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LG전자의 지난해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2조4783억원으로 전년보다 27.5% 줄었다. 사업부문별 실적은 아직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로벌 TV 시장의 수요둔화와 경쟁심화가 영업이익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고 회사 측은 설명해 관련 사업을 담당하는 MS 부문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MS 부문의 지난해 1~3분기 영업이익은 -4894억원이다.
B2C에서 B2B로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기업과 소비자 거래(B2C)인 생활가전의 성장에 한계가 왔음을 직감하고, 기업간 거래(B2B)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환해 실적을 회복시키겠다는 목표다.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 겸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은 CES 2026에서 B2B인 로봇과 공조, 전장, 메디컬 테크놀로지 등을 4대 신성장동력으로 삼아 지속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노 사장은 “로봇 분야는 미래의 중요한 성장동력”이라며 “지난해 인수한 레인보우로보틱스와 삼성전자 DX 부문이 협업해 기반 기술부터 로봇에 투입하는 피지컬 AI 엔진까지 개발하고 있다. 다양한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추진 중인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투입할 로봇을 개발 중이다. 현장에서 용접이나 짐을 옮기는 로봇 자동화 시스템을 공동 개발해, 향후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중공업에 이어 다른 계열사 제조 거점에서도 테스트를 거친 후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할 것으로 관측한다.

삼성전자는 미래사업으로 점찍은 4대 분야 육성을 위해 올해도 유망 기업을 인수합병(M&A)해 빠른 시장 진입 및 점유율 확대를 노린다. 지난해에는 유럽 최대 중아 공조기업인 ‘플랜트’와 전장기업 ‘ZF’의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사업부,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젤스’ 등을 연이어 인수해 사업 경쟁력을 강화했다.
LG전자는 전장(VS)과 냉난방공조(HVAC)에 역량을 집중시킨다. VS 부문은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제품이나 전기차용 구동 부품, 자동차 램프, 보안용 소프트웨어 등을 생산·판매한다. 품질과 안전이 최우선사항이어서 공급 부품에 대한 높은 신뢰도와 누적 경험치가 필요해 진입 장벽이 높다. B2C인 가전과 달리 B2B 사업이라 상대적으로 경기 흐름을 덜 받는다.
LG전자 관계자는 “VS 부문은 100조원 규모의 수주잔고로 장기 매출과 구조적 성장성을 갖춘 핵심 사업”이라며 “고객사인 글로벌 완성차 기업이 원하는 수준의 성능과 안전성을 갖춘 제품을 개발해 지속적인 질적 성장을 이루겠다”고 전했다.
냉난방공조 연평균 6.4% 성장
HVAC는 삼성·LG전자 모두 눈독을 들이는 분야다. 시장조사기관 마켓앤마켓에 따르면 글로벌 HAVC 시장 규모는 지난해 2992억8000만 달러(약 430조원)에서 2030년 4077억7000만 달러(약 585조원)로 커질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6.4%다.
에너지 소비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이 커짐에 따라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HAVC 기술을 찾는 기업들이 많아지는 것이 수요확대의 배경이다.
삼성전자는 HAVC의 성장에 맞춰 지난해 5월 독일 플랙트그룹을 2조3000억원에 인수한 바 있다. 플랙트는 데이터센터와 공장 클린룸, 산업·주거용 건물 등 여러 시설에 냉각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플랙트 인수 이후 중동에서 종합의료센터와 같은 대규모 시설을 중심으로 일감을 확보하면서 삼성전자의 중심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LG전자 역시 인공지능(AI) 투자 광풍에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증하자 고효율 공조 시스템으로 일감확보에 나섰다. LG전자에서 HAVC 사업을 담당하는 ES 부문의 영업이익률은 약 10%로 고마진이 담보되는 만큼 사업 육성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얼마나 많은 TV나 냉장고, 세탁기를 1년에 판매했는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회사에 오랜 기간 지속적인 수익을 안겨줄 수 있는지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며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하향세를 보이는 가전사업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창출이 가능한 B2B 사업에 더욱 집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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