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994의 시간, LG 선발의 질감이 시리즈를 지배했다.

대전의 마지막 밤은 의외로 조용하게 끝났다. 24시간 전만 해도 모두가 4차전의 충격을 곱씹고 있었고, 한화가 벼랑 끝에서 한 번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5차전 첫 이닝, 신민재의 2루타와 김현수의 좌전 적시타가 깔끔하게 선취점을 찍는 순간 공기는 미세하게 기울었다. 문동주의 공은 최고 150㎞가 채 나오지 않았고, 스트라이크를 잡는 과정도 버거웠다. 한화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1이닝 21구, 1실점. 벤치는 계투 총력전으로 선회했고, 이 선택은 그 자체로 마지막을 예고하는 문장처럼 보였다. LG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3회 무사 만루에서 오스틴이 삼진을 당해도, 오지환의 희생 플라이로 한 점만 더해도, 톨허스트만 안정적으로 이닝을 지우면 자연히 틈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알고 있던 대로, 6회 김현수의 깨끗한 좌중간 적시타가 3-1을 만들었고, 9회 홍창기의 희생 플라이가 4-1로 마침표를 찍었다. 우승 세리머니가 시작될 때까지 LG는 급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사실 요약만 적어도 흐름은 선명하다. LG가 5차전을 4-1로 잡았다. 시리즈는 4승 1패. 2023년에 이어 다시 통합 우승이다. 첫 타석부터 결정적인 장면을 만든 건 신민재와 김현수였고, 마지막을 봉인한 건 톨허스트의 7이닝 1실점이었다. 반대편 한화는 문동주를 1이닝 만에 내리고 정우주, 황준서, 김종수, 조동욱, 주현상, 류현진까지 쏟아 넣었지만 3점을 뒤집을 도화선을 끝내 못 찾았다. 7회와 8회, 선두 타자가 나간 이닝마다 병살타가 흘러나오며 탄식이 반복됐다. 시리즈 전체를 돌아봐도 대세는 다르지 않다. 톨허스트가 1·5차전에서 두 번이나 승리를 책임졌고, 치리노스가 4차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복귀전을 완성했다. 2차전 임찬규가 흔들린 날에도 타선이 폭발했고, 4차전 9회에는 박동원과 김현수가 순서대로 칼을 빼들었다. LG의 승부는 계획에서 어긋남이 적었다.

이 우승의 키워드는 결국 선발의 질감이었다. 톨허스트는 ‘완벽한 퍼즐 조각’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최고 154㎞ 직구로 하이존을 두드리고, 포크로 한 박자 늦게 떨어뜨리는 방식은 한화 타선의 참을성을 계속 시험했다. 3회 무사 1·2루에서 문현빈을 병살로 지워버린 공 하나가 경기 전체의 공기를 바꿨다. 7회 선두 채은성 안타 뒤 하주석을 또 병살로 묶어버리는 장면에선, 그가 왜 이 팀의 1선발이 되었는지가 다시 설명됐다. 떠올려보면 1차전도 이랬다. 위기가 오면 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가고, 불리하면 바깥으로 반 발짝 빼는 선택으로 타자를 따라오게 만드는 투구. LG가 시즌 막판 불펜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선발을 길게 가져가는 플랜을 세운 순간, 퍼즐은 완성된 셈이었다. 1994년 이후 처음이라는 ‘10승 선발 4명’의 폭은 정규시즌에서 1위를 지켜냈고, 한국시리즈에선 큰 흔들림 없이 판을 유지했다.

김현수의 존재는 설명보다 장면으로 남는다. 4차전 9회, 2사 2·3루에서 밀어친 역전 적시타가 사실 시리즈의 결승타였다. 5차전에서도 첫 타석에 선취점을 가져왔고, 6회 다시 2점 차를 만드는 적시타로 한화의 숨을 눌렀다. 통산 포스트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102개로 고쳐 썼다는 기록적 의미도 크지만, 더 크게 보이는 건 ‘맞아야 할 때 맞춘다’는 신뢰다. LG의 타선은 한 방이 필요한 순간에 박동원이 있고, 끊어야 할 때 신민재가 있고, 어렵게 갈 때 오지환이 희생 플라이로 풀어내는 순환 구조였다. 4차전이 그랬고, 5차전도 그랬다.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가 더 안정적인 팀의 결이다.

한화의 입장에선 4차전이 시리즈의 분수령이었다. 와이스의 117구가 영웅담으로 남았어야 할 밤에, 9회 두 투수의 교체 타이밍이 다시 어긋났다. 마무리를 살리고 싶었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단기전에서 믿음은 결단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볼넷 하나와 한가운데 실투 하나, 그리고 그 다음 볼넷까지. 그 사이에 벤치가 반 박자 빨랐더라면 5차전의 이야기 구조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벤치는 늘 결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더 잔인하지만, 그 잔인함을 감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김경문 감독이 “2등은 아프다”고 한 말은, 이 팀이 한 시즌동안 걸어온 길의 밀도를 생각하면 더 무겁게 들린다. 정규시즌 2위, 19년 만의 한국시리즈 무대, 벼랑 끝에서 건진 3차전의 ‘기적의 8회’. 그런 길 끝에 4차전 9회가 놓였다.

5차전에선 타선의 밀도가 빠졌다. 2회 1사 만루에서 이원석의 땅볼로 겨우 동점은 만들었지만, 이어진 2사 2·3루에서 심우준의 포수 앞 땅볼이 굴러나왔다. 3회 무사 1·2루는 문현빈의 병살로 끝났고, 7회 선두 채은성 안타 뒤 하주석의 병살, 8회 황영묵 안타 뒤 손아섭의 병살. 중요한 순간마다 같은 형태로 끊겼다. 톨허스트가 의도적으로 바운드가 낮은 변화구와 직구의 혼합으로 바운드 볼을 유도했음을 감안해도, 한화의 어프로치가 ‘한 방’에 묶여 있었던 건 분명하다. 4차전의 상흔이 타석에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리베라토의 스윙은 짧지 않았고, 문현빈의 배트 스피드도 살아 있었지만, 타석 하나를 끌고 가는 ‘간수’가 보이지 않았다. 3차전의 문현빈, 심우준, 최재훈이 돌려가며 맡았던 그 역할 말이다.

한화의 투수 운용을 탓하기만 하는 건 공평하지 않다. 1회 문동주 교체는 불가피했고, 정우주와 황준서가 재빨리 불을 껐다. 김종수와 조동욱, 주현상은 실점 위기에서 몸을 던져 막았다. 8회 류현진 카드는 총력전의 상징이었고, 그 자체로 팀을 다잡는 시그널로 유효했다. 다만 그런 총력전이 유의미해지려면 공격이 다음 장면을 써야 한다. 그게 7회와 8회 병살로 끊긴 게 아쉬움의 본질이다. 벤치가 5차전에서 취할 수 있는 카드는 거의 다 썼다. 팀을 끝까지 묶어 세운 리더십은 분명했고, 그래서 패배가 더 쓰렸다.

LG의 우승은 팀 설계의 정답에 가깝다. 선발의 질감, 중간의 보완, 타선의 역할 분담, 그리고 베테랑의 결정타. 톨허스트 영입은 모험처럼 보였지만, 실제론 철저한 프로파일 분석이 바탕이었다. 포크의 종단 낙차, 직구 존 운영의 단순함, 그리고 무엇보다 ‘맞아도 길게 가지 않는다’는 성향. 한국 야구의 포스트시즌은 공을 길게 붙잡는 투수에게 유리하다. 볼넷으로 무너지는 투수는 ‘명분’과 ‘설명’을 남기지만, 경기에는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톨허스트는 반대였다. 지우개처럼 아웃카운트를 덧칠했고, 그 사이 타선은 필요한 점수를 넣었다. 2년 만의 통합 우승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한화가 얻은 건 상처만은 아니다. 19년 만의 한국시리즈와 26년 만의 홈 승리, 와이스의 117구, 3차전의 8회 6득점, 김서현의 눈물과 환호, 그 사이를 채운 수많은 장면이 다음 시즌의 토대다. 단기전의 공부는 냉정해야 한다. 불펜의 구조를 다시 짜고, 마무리의 리스크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7·8회 셋업 구간을 보다 유연하게 쓰는 플랜B, 좌우 매치업의 적극적 전환, 첫 타자 볼넷 이후 강제 트리거 같은 규칙의 내재화가 시급하다. 타선은 고비에서의 어프로치를 다듬어야 한다. 스코어가 작을수록 초구를 통과하는 방법, 1·2루 무사에서 병살을 피하는 선택, 2사 2·3루에서 ‘외야로 보내는’ 스윙의 확률을 키우는 루틴. 이런 건 캠프에서 만들어진다. 김경문 감독이 “어린 선수들은 숙제가 있다”고 한 건 변명이 아니라 계획의 언어다.

무엇보다 한화는 어느새 ‘가을을 말할 수 있는 팀’이 되었다. 시즌 초반의 질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고, 포스트시즌에서 상대의 마무리를 무너뜨리는 순간도 보여줬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교체의 타이밍을 놓친 건 사실이지만, 그 타이밍을 다시 맞추는 경험을 했다. 프로 스포츠의 승패는 마지막 한 박자에서 갈린다. 올가을 한화는 그 한 박자를 두 번 놓쳤다. 다음 시즌의 목표는 단순하다. 그 한 박자를 먼저 당기는 것. 그러면 ‘2등은 아프다’는 말을 ‘올해는 달랐다’로 바꿀 수 있다.

LG는 웃었다. 톨허스트가 막고, 김현수가 치고, 박해민이 잡고, 오지환이 보탰다. 신민재는 사이사이 빈틈을 채웠고, 문보경은 흐름을 바꿨다. 유영찬은 하루를 무너지고 다음 날을 지켰다. 우승팀은 결국 이런 팀이다. 실패를 하루 머물게 하고 다음 날을 다른 날로 만든다. 다시 전광판이 꺼진다. 대전의 밤은 조용하고, LG의 버스는 가볍다. 한화의 더그아웃에 남은 정적은 길겠지만, 야구는 금방 돌아온다. 오늘의 박수와 한숨이 내년의 초구를 만든다. 그 초구가 스트라이크 존을 가르는 순간, 이 가을의 문장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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