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없으면 망한다더니?" 흥국생명 4위 진출에 배구 전문가들이 '사과문' 쓴 사연

'배구 여제' 김연경이 떠난 자리는 거대한 공동(空洞)일 줄 알았습니다. 시즌 전 모든 전문가와 팬들이 흥국생명을 향해 '꼴찌 후보'라는 냉정한 성적표를 미리 던졌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2026년 3월, 흥국생명이 남긴 결과는 준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당당한 '성공'이었습니다. 비록 24일 장충에서 열린 준PO에서 실바의 화력을 막지 못해 1-3으로 패하며 여정을 멈췄지만, 흥국생명의 2025-26 시즌은 그 어떤 우승팀보다 값진 '성장'의 서사였습니다.

"범실 562개의 기적" 일본식 짠물 배구, 한국 코트에 이식되다

이번 시즌 흥국생명을 관통한 키워드는 단연 '요시하라 매직'이었습니다. 사상 최초의 외국인 여성 사령탑인 요시하라 토모코 감독은 김연경이라는 거대한 태양 아래 가려져 있던 선수들에게 스스로 빛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가장 놀라운 수치는 팀 범실입니다. 흥국생명은 시즌 내내 단 562개의 범실만을 기록하며 7개 구단 중 압도적인 최소 범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최다 범실팀인 정관장(726개)과 비교하면 경기당 약 4~5점의 실점을 스스로 줄인 셈입니다. 화려한 공격수는 없었지만, 끈질긴 디그와 정교한 이단 연결로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일본식 조직력'이 흥국생명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특정 선수 의존증 탈피" 레베카 벤치 앉히고도 세트 따내는 '시스템 배구'의 힘

냉정하게 분석하자면, 요시하라 감독의 용병술은 V-리그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외국인 선수 레베카 라셈이 부진하면 이름값에 상관없이 과감히 벤치로 불러들였고, 정윤주, 최은지, 김다은 등 국내 선수들로만 라인업을 짜 승리를 따내는 '파격'을 선보였습니다.

준PO 1세트에서도 레베카를 빼고 국내 선수들로만 기선을 제압했던 장면은 요시하라 감독이 추구하는 '누가 들어가도 제 몫을 하는 팀'의 실체를 보여줬습니다. 세터 이고은의 부상 속에서도 신예 서채현과 베테랑 이나연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전력의 공백을 최소화한 점은 그녀가 왜 일본 배구의 전설인지를 입증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매직이라 불릴 만큼 낮았나?" 요시하라의 뼈 있는 농담과 한국 배구의 과제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요시하라 감독은 '요시하라 매직'이라는 표현에 대해 "매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팀의 평가가 낮았나?"라며 웃음 섞인 뼈 있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이는 외부의 차가운 시선을 실력으로 되받아친 승자의 여유이자, 이름값에만 의존하는 한국 배구계의 관행에 던진 일침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준PO에서 드러났듯, 실바와 같은 압도적인 '거포'를 제어할 수 있는 확실한 블로킹 전략이나 결정적 한 방의 부재는 다음 시즌 흥국생명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하지만 "한국 배구가 어떻게 하면 다시 세계로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흥국생명은 이번 시즌을 통해 한국 배구가 나아가야 할 '기본기 중심의 현대 배구'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이젠 우승 후보로" 김연경의 그림자를 지우고 '팀 흥국생명'으로 도약

이제 흥국생명에 김연경의 공백을 묻는 이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다현이라는 센터진의 핵을 영입하고, 정윤주와 김다은이라는 확실한 미래를 확인한 이번 시즌은 다음 시즌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듭나기 위한 완벽한 '빌드업'이었습니다.

장충의 봄은 단판 승부로 끝났지만, 흥국생명 팬들은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생했다", "내년엔 더 높이 가자"는 격려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꼴찌 후보에서 봄 배구의 주역으로 우뚝 선 흥국생명. 요시하라 감독과 선수들이 써 내려갈 2026-27 시즌의 '진짜 마법'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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