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터 창간 19주년 특별기획
기업의 성공과 실패는 리더의 한 수에 달려 있습니다. 블로터는 기업 대표이사가 직면한 위기 상황부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 행동, 그리고 그 결과까지 STAR(Situation, Task, Action, Result) 기법으로 분석해 리더십의 본질을 조명합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국 정부의 관세 정책 등 산업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다. 국내 1위 기업 삼성전자 역시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에선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경쟁사 SK하이닉스에게 넘겨주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선 대만 TSMC와 격차가 벌어지며 위기 상황이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가전 역시 시장 포화와 더불어 중국 업체들의 맹추격으로 녹록지 않은 환경에 처했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이재용 회장은 선대부터 이어진 특유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이 회장의 리더십은 단기적인 위기 대응을 넘어 장기적 성장 비전 제시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3년 만에 뺏긴 D램 1위…역동성 없는 '삼무원' 조직 문화
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위기는 기술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사업을 맡고 있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인공지능(AI) 대전환 시기에 HBM 등 차세대 제품의 연구·개발(R&D)보다 기존 레거시 제품에 집중하면서 경쟁사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넘겨줬다.
이러한 실기(失期)는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 DS부문는 지난해 15조1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경쟁사 SK하이닉스(23조4673억원)에 역전을 허용했다. D램 메모리 분야에선 올해 1분기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내주며 33년 만에 왕좌에서 내려왔다.
파운드리 분야의 경우 매년 적자를 기록하며 1위인 대만 TSMC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고 3위인 중국 SMIC와의 점유율 차이는 좁혀졌다. 실제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1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7.7%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같은 기간 TSMC는 67.6%로, 두 회사의 격차는 작년 4분기 59%p에서 59.9%p로 확대됐다. 또 중국 SMIC와의 격차는 1.7%p에 불과해 2위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삼성전자에서 DS부문은 회사 전체 실적의 50∼60%를 견인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즉 반도체 사업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회사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러한 지표는 실적으로도 확인된다. 2022년 418조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2023년 358조원, 2024년 399조원으로 2년 연속 400조원대를 지키지 못했다.
또한 속도전과 실행력으로 대표되던 삼성 특유의 조직 역동성 역시 눈에 띄게 둔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인 임원 승진보다 워라밸과 정년 보장을 택하는 고참 직원이 늘면서 '삼성+공무원'의 합성어인 일명 '삼무원'이란 오명이 업계 안팎에서 제기됐다.
실제 삼성전자가 올해 상반기 공시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20대 임직원 수는 2022년 8만3155명에서 2023년 7만2525명, 2024년 6만3531명으로 점차 줄어든 반면 40대 이상 임직원은 2022년 7만5516명에서 2023년 8만1461명, 2024년 8만5081명으로 점점 늘어났다.
직급별로도 일반 사원은 2022년 18만2323명에서 2024년 16만4895명으로 9.6% 줄었지만 CL3(과장, 차장), CL4(부장급) 등 임직원은 8만6498명에서 9만6294명으로 11.3% 늘었다.
조직문화 혁신·비전 2030 '속도'…테슬라 등 美 빅테크 수주 시동
이 회장은 연초부터 '사즉생(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독한 삼성인' 등 사업부별로 강도 높은 메세지를 던졌다. 이는 삼성 고유의 위기 극복 DNA를 통해 '1등을 향한 집념'과 '압축 성장의 실행력'을 되살려야 한다는 절박감이 담긴 메시지로 풀이된다.
이를 두고 재계 안팎에선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0년 뒤를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 등 항상 위기를 강조하며 단기적 성과에 대한 안주를 경계하던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을 연상케 한다는 반응도 나왔다.
실제 이 회장의 리더십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다. 2016년 '갤럭시노트7 발화 사태'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초도 물량 250만대의 리콜'과 '조기 단종'을 결정하는 등 발빠른 대처로 고비를 넘겼다.

인재 등용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 회장은 줄곧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며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특급 인재 발탁과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삼성전자 역시 올해 상반기 갤럭시 AI폰 개발을 주도해 온 최원준 모바일경험(MX)사업부 사장을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임명한데 이어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마우로 포르치니를 외국 최초로 디바이스경험(DX)부문 최고디자인책임자(CDO) 사장으로 영입했다.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 회장은 대규모 선제 투자를 통해 AI 메모리 초격차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2022년 향후 5년간 45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바이오 △AI·차세대 통신 등 미래 먹거리를 육성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반도체 부분에선 신규 팹(공장) 건설과 R&D 등에 집중 투자를 벌이고 있다. 기흥캠퍼스에는 20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연구용 팹 3기와 14만평 규모의 차세대 반도체 연구동을 건립 중이며 평택캠퍼스에는 메모리·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를 아우르는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또한 HBM 주도권 회복을 위해 HBM3E(5세대)에 탑재되는 10나노급 1a D램(4세대) 칩에 다양한 구조를 새롭게 적용했다. 차세대 제품인 HBM4(6세대)에서는 업계 최초로 10나노 6세대 1c 공정을 적용하고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을 활용하는 등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파운드리 부문에선 '비전 2030'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서 이 회장은 2019년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33조원을 투자해 오는 2030년 업계 1위로 오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일환으로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과 테일러에는 총 370억달러(약 54조 원)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운영·건설 중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연말 양산을 시작하는 2나노 공정에 역량을 모으고 있다. 2나노는 3나노 공정 대비 성능이 12%, 전력효율성이 25% 가량 향상된 기술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의 2나노 수율이 30~40%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연말까지 60% 이상으로 높인다는 목표다.

사법리스크 해소 후 이 회장의 글로벌 광폭 행보 역시 빛을 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테슬라에 이어 애플까지 잇따라 대형 수주에 성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이 직접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책임자(CEO) 등과 화상 통화를 하는 등 계약을 이끈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최근 한미정상회담 경제사절단 출장 기간에는 정상회담 직후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행사장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만나 포옹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 만남에서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행사 직후 열린 현지 기자간담회에서 "엔비디아 슈퍼컴퓨터에 최적화된 반도체칩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제공하는 논의가 있었다"며 "인공지능(AI) 산업에서 양국의 협력 가능성을 재확인 했다"고 밝혀 향후 협력 확대 기대감을 키웠다.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엔비디아에 HBM3E 12단 제품의 퀄(품질) 테스트를 받고 있는데 업계에선 올 하반기 통과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엔비디아가 내년 하반기 출시를 예고한 최신 고사양 AI 가속기 '루빈'에 탑재될 HBM4(6세대) 제품의 샘플도 제공한 상태다.
권용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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