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만 골라서 처단…‘신이 내린 영웅’의 위험성
살인자ㅇ난감
※ 이 글에선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를 다루고 있어 시청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정의 실현 어떻게 확신하는가
원작 회의론→드라마 광신론
‘방구석 혐오세력들’이 열광할
‘메시아 탄생’ 푸닥거리 공들여
‘살인자ㅇ난감’이 출시한 지 2주가 넘었지만 여전히 화제이다. 설날 연휴를 집어삼킨 후로도 외국의 반응까지 뜨겁다. 드라마는 2010년에 나온 웹툰이 원작이다. 웹툰의 명성이 높았기에 드라마화에 기대가 높았다. 이창희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과 최우식·손석구·이희준을 비롯해 배역에 꼭 맞게 캐스팅된 배우들이 호연을 펼쳤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살인자ㅇ난감’은 기존의 ‘자경단 장르물’이 생각하지 못한 지점을 파고든 매우 독특한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 글에서는 드라마의 주제인‘정의’의 문제와 음험하게 향하는 ‘광신’의 지점을 논해볼 생각이다.
재밌는 스릴러물, 희한한 히어로물
‘살인자ㅇ난감’은 독특한 사건 전개와 정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참신하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이런 상찬은 원작의 몫이다. 드라마는 인물과 사건을 원작에서 충실히 가져왔다. 다만 원작 웹툰이 워낙 간략한 그림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연출과 연기로 표현할 여지가 많았다. 감각적인 연출과 편집이 눈에 띈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교차 편집하는 방식이나 사물 연결 편집, 슬로 모션, 판타지 장면의 삽입 등은 손꼽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기교적인 측면의 연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제에 대한 접근일 것이다.
평범한 대학생 이탕(최우식)이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마침 그가 악인이었고 증거도 모두 사라진다. 이런 기막힌 일이 심지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러자 이탕에게 해커 노빈(김요한)이 나타나 “정의를 실현할 영웅”이라 치켜세우며 조력자를 자처한다. 이탕은 확신을 가진 영웅처럼 눈빛이 변해 악인들을 처단한다. 하지만 송촌(이희준)의 등장으로 흔들린다. 송촌은 과거 노빈과 함께 ‘정의를 실현할 영웅’으로 활동하였다가 노빈에게 버림받았다. 오랫동안 송촌을 쫓던 장난감(손석구) 형사가 이탕과 노빈의 ‘영웅놀이’를 눈치채고 집요하게 쫓아온다. 네명이 마지막에 한자리에 모여 끝내기 혈투를 벌인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일단은 기묘한 살인 사건이 반복 등장하는 스릴러물로 보기에 재미있다. 우연이 반복되는 부조리극처럼 느껴지면서 묘한 아이러니가 돋는다. 특히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블랙코미디적인 낯선 쾌감이 한가득하다. 한편으로는 희한한 히어로물의 서막처럼 읽힌다. 이름하여 ‘케이(K)-운빨 히어로’라고나 할까. ‘배트맨 비긴즈’(2005)가 나약한 개인이 어떻게 영웅으로 거듭났는지 그 시작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아직 도착하지 않은 히어로물의 일종의 프리퀄(전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배트맨’이나 ‘모범택시’ 같은 장르가 고민해야 하는 근본적인 주제 의식인 ‘법을 초월한 정의’의 문제, 즉 ‘영웅은 자신이 정의를 실현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꽤 깊이 파고든다.
법·힘·앎 능가하는 ‘초월적 정의’
네 인물, 이탕·노빈·송촌·장난감은 각자의 정의를 대표한다. 장난감 형사는 공권력을 대표한다. 그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기에, ‘영웅놀이’를 하는 이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도 모순이 있다. 송촌을 쫓는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장난감은 경찰이었던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송촌을 용서할 수 없다. 장난감은 어머니의 불륜 상대로 송촌을 오해하였다. 원작에서는 장난감이 아버지를 강직한 경찰로 오랫동안 믿고 존경해왔음이 강조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부자 관계가 살갑지 못했음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송촌이 죽기 직전 말해준 장난감 아버지의 비리 혐의가 원작에서 더 극악하다. 게다가 원작에서는 어머니의 진짜 불륜 상대가 장난감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이였다. 즉 원작에서 밝혀지는 장난감의 가족사가 더 파국이다. 이는 장난감이 그토록 믿었던 ‘아버지의 법’의 세계가 철저하게 붕괴되었음을 납득시킨다. 그리고 장난감이 송촌을 쏴 죽이는 행위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장난감의 지론은 살인과 함께 무너진다. 장난감은 자신의 정당방위를 소명하지 않고 경찰을 그만둔다. 드라마는 장난감으로 상징되는 ‘법에 의한 정의’가 그의 가족사에서 보듯 원래 취약한 것이고, 결국 완전히 파탄 나는 결말을 보여준다.
송촌은 ‘힘에 의한 정의’이다. 그는 과거 형사였던 시절에 수사하던 감과 실력으로 수사를 한다. 맞다 싶으면 윽박지르고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낸다. 그리고 죽인다. 그러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하냐고?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실수도 있기 마련이다. 노빈이 죽일 놈들을 찍어줄 때는 편했다. 하지만 너무 잔혹하고 무분별하게 사람을 죽인다고 노빈의 버림을 받은 뒤, 장난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혼자 활동 중이다. 그러다 보니 걸리는 대로 온갖 자잘한 악인들을 다 죽이고 있다. 진짜 악인을 죽인다는 확신이 없기에, ‘반성문’을 받아 위안 삼는다. 그에게 이탕의 출현은 근본적인 회의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다. 어떻게 알짜 악인들만 그렇게 골라 죽일 수가 있는가. 노빈의 새 낙점을 받았다는데, 그는 무엇이 다를까. 무엇보다 송촌에게는 없는 바로 그 ‘확신’이 이탕에게는 있는 걸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기준이 뭐냐고. 어떻게 ‘확신’하냐고. 그리고 제안한다. 자신과 함께하지 않겠냐고. 송촌은 강한 것 같지만 확신이 없기에 취약하다. 엄청난 근력을 발휘하지만 당뇨와 고혈압 등 내과 질환을 앓는다. ‘힘에 의한 정의’가 속 빈 강정이라는 환유다.
노빈은 범죄로 부모를 잃었다. 겉으로 봤을 때 그는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타쿠 같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앎의 소유자이다. 지식과 정보를 자유자재로 주무른다. 검찰청 사이트를 해킹하고, 인터넷 생방송으로 경찰을 곤경에 빠뜨리고, 검사의 휴대폰에 있던 동영상을 빼서 그의 악행을 확인한다. 자료를 수집해 악인을 판별하고, 영웅을 발견하고 영웅에게 논리를 부여한다. 그는 ‘앎에 의한 정의’를 대표한다. 그는 잔혹한 송촌이 틀렸다고 생각할지언정 자신의 정의 실현이 잘못되었다고 회의하지는 않는다. 그는 마지막까지 이탕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한다. 정의에 대해 가장 이성적이면서도 가장 순교자적인 확신의 태도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믿음대로 죽어 이탕을 살림으로써 자기 확신을 완수한다.
이탕에게 있는 것은 오직 본능적인 육감뿐이다. 악인과 스치는 순간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여기에 굉장한 ‘운빨’을 지녔다. 하지만 이것은 믿자면 믿는 것이고, 안 믿자면 안 믿기는 희미한 기적이다. 이것을 ‘초월적 정의’라 말할 수 있을까. 이탕에게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유약하다. 그는 처음 살인하고 벌벌 떤다. 두번째 살인을 하고는 자살하려 한다. 하지만 노빈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고, 경험이 축적되고 검증을 거칠수록 자신의 감각과 능력과 윤리에 확신이 쌓인다. 운동하고 칼질을 연습하며 점차 과감해지던 중 송촌을 맞닥뜨리자 이탕은 도망친다. 무엇이 그토록 겁난 걸까. 법도 두렵고, 윤리도 두렵고, 죽음도 두렵지만 송촌 같은 사람이 될까봐 가장 두려워진 것은 아닐까. 원작에서는 마지막 혈투 장면에서 이탕이 오줌을 지리고 법적 죽음을 맞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드라마는 그에게 다른 결말을 부여하며 그의 ‘초월적 정의’를 추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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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적 열정과 테러리스트
드라마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두어 의미 해석에 큰 차이를 만든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회의론에서 광신론으로 아슬아슬한 건너뛰기가 이루어진다. 드라마가 원작과 가장 크게 차이 나는 지점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원작에 비해 노빈과 송촌의 비중이 높은 것이고, 또 하나는 원작에선 노빈이 이탕의 신분으로 죽지만, 드라마에서는 노빈이 모든 죄를 자신이 지고 노빈의 이름으로 죽는 점이다. 그 결과 원작에서 이탕은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지만 드라마에서 이탕은 아무런 법적인 책임 없이 자유의 몸이 된다.
원작은 ‘영웅은 자신이 정의를 실현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도 답할 수 없다’는 회의론을 견지한다. 즉 장난감과 이탕의 대립 구도에서 둘을 철저하게 붕괴시키며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드라마는 노빈에 의해 지지되고, 송촌에 의해 반증되는 이탕이 마지막까지 (스스로 당긴) 장난감의 총알과 법망을 피해, 즉 ‘신의 가호를 받아’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결말을 보여준다. 결국 늘어난 노빈과 송촌의 분량은 모두 이탕이라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한 푸닥거리였다. 노빈은 그의 소명을 일깨우는 세례자 요한으로, 송촌은 그를 시기하고 대적하고 시험하는 사탄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즉 드라마의 포스터에 걸려 있는 카피 ‘신이 내린 영웅인가, 심판받을 악인인가’에서 드라마는 ‘신이 내린 영웅’ 쪽으로 균형추가 꽤 기울어진 상태이다. ‘신적 권능’이라는 종교적인 주제를 깔고 있으면서도 종교적인 메타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드라마에서 에필로그처럼 붙은 장면에서 돌아온 이탕이 어머니가 교회에 가는 눈길을 몰래 쓸어놓았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거룩하고 성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돌아온 이탕에게는 노빈도 없다. 오직 자신의 육감과 확신만 믿고 가야 한다. 자신을 ‘신이 내린 영웅’으로 믿는 광신의 존재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와는 또 다른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들이 노빈의 열등재인 ‘방구석 혐오세력’과 결합하여 메시아적인 열정에 휩싸일 때, 자경단이 아닌 테러리스트가 태어난다. 드라마 속 불필요한 베드신 논란이나 아역 배우 딥페이크 논란도 중요하지만, ‘살인자ㅇ난감’에 어른거리는 광신의 그림자에 대해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때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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