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자동차 캐즘(일시적 수요정체)이 장기화되면서 국내 배터리 산업을 인위적으로 통폐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배터리 분야가 하나의 산업으로 개화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해 강제적인 구조조정을 시도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과거 조선 업계가 10년의 암흑기를 버텨내고 최근 국가를 대표하는 수출산업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배터리 산업 역시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위기는 산업의 구조적 사양화가 아니라 글로벌 업황 악화에 따른 일시적 진통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장기불황 버틴 조선업, 배터리 롤모델
정부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배터리 산업 재편론의 근거는 과잉투자와 수익성 악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새 버팀목인 배터리 산업의 경착륙을 막으려는 정부의 고충은 이해하나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짧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조선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넘는 장기 불황을 견뎠다. 당시 조선사들은 저가수주 경쟁과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의 고통을 이겨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메스’를 댄 것은 불황이 시작된 지 10여년이 흐른 2019년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추진 때부터다.

당시 정부는 ‘빅3’ 체제를 ‘빅2’로 재편하려 했으나 유럽연합(EU)의 반대로 무산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우조선은 한화그룹에 인수돼 한화오션으로 거듭났고, 지난해 영업이익 1조원대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인위적인 통폐합 대신 시장 자율에 맡긴 선택이 최적의 해법이 된 셈이다.
배터리 업계가 본격적인 어려움을 겪은 것은 고작 2~3년이다. 조선업에는 10년을 기다려준 정부가 배터리 산업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구조조정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전문위원은 “배터리를 사양산업으로 판단해 기업을 줄이거나 시장 규모를 축소한다는 접근방식은 적절하지 않다”며 “전략산업으로 유지하고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배터리 산업은 과거 조선업처럼 업황 사이클이 나아질 경우 경쟁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크다”며 “전기차 외에 에너지저장장치(ESS)와 로봇, 방산, 미래 모빌리티 등 다양한 분야로 수요가 확장될 산업인 만큼 시장이 회복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빛 좋은 개살구’ 법인세 감면 혜택
미국이나 중국 등이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등으로 배터리 기업에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배터리 업황이 나아질 때까지 정부가 추가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은 배터리 셀과 모듈에 kWh(킬로와트시)당 최대 45달러의 세액공제를 제공하고 이를 현금으로 환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중국은 설비투자부터 운영자금까지 전방위 지원을 실시하며 일본도 수조원의 생산보조금을 배정해 배터리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법인세를 일부 감면해주는 수준으로 적자전환해 법인세를 내지 않는 기업은 혜택을 볼 수 없는 구조다. 지난해 삼성SDI는 1조7224억원, SK온은 931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가운데 법인세를 감면받는 기업은 1조3461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LG에너지솔루션뿐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산업정책팀 관계자는 “상의와 배터리 기업이 힘을 합쳐 1~2년 전부터 다이렉트페이(세액공제직접환급제)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정부에 건의해왔다”며 “중국 등 경쟁국은 정부의 막대한 연구개발(R&D) 보조금으로 기술력을 향상시키며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지만 우리 기업은 실질적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배터리가 미래 친환경 산업의 핵심인 만큼 정부는 물론 국회도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전방위적 지원에 나서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다이렉트페이는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액을 현금으로 환급해 기업에 지급하는 제도다. 현재의 세액공제 방식은 법인세 감면에 국한돼 대규모 초기 투자나 업황 급변으로 충분한 영업이익을 확보하기 어려운 배터리 등 첨단산업 분야의 기업에는 실효성이 낮다.
상의를 중심으로 정부와 국회에 이 같은 제도 도입을 강력하게 건의하고 있지만 아직 진행된 것은 없다. 오히려 정부는 배터리 산업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1사·2사·현 상태 유지, 배터리 재편 시나리오
일각에서는 정부의 배터리 산업 재편 움직임을 반긴다. 전기차 캐즘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국가나 기업의 투자확대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우려에서다. 기업의 자구 노력으로 실적이 회복될 시기를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정부의 강제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한다.
한편 정부 주도의 배터리 산업 재편이 시작될 경우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초대형 단일기업 체제다. 조선업 구조조정 사례처럼 업계 선두인 LG엔솔에 SK온과 삼성SDI를 합병해 국가대표급 기업으로 육성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시장 재편을 통한 2사 체제다. 재무적 어려움 등이 가장 큰 기업을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는 기업에 흡수시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2개 기업으로 만드는 시나리오다.
마지막은 자율회복을 위한 정책지원이다. 현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시장과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위적 통폐합이 아닌 정부의 파격적인 금융·세제 혜택으로 기업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배터리 산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도약을 준비하는 단계”라며 “지금은 생태계를 허무는 구조조정이 아니라 겨울을 견딜 수 있는 따뜻한 외투를 정부가 함께 마련해줘야 할 시기”라고 제언했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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