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신격호 회장이 생전에 장훈 씨를 챙긴 이유
요미우리를 떠나기 싫었는데…
그의 나이 40세 때다. 연도로 따지면 1980년이다.
여전히 현역이다. 하지만 내리막은 이미 뚜렷하다. 직전 시즌에 77경기 밖에 못 뛰었다. 당연하던 3할 타율과도 거리가 멀다. 0.261로 한 해를 마쳤다.
“5월쯤이다. 시력에 이상을 느꼈다. 중심성 망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안과 최고의 권위자라는 의사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더라. ‘이대로 끝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다. 마침 같은 맨션(아파트)의 이웃을 알게 됐다. 그 역시 안과 의사였다. ‘원하는 만큼 야구할 수 있게 고쳐 드리겠다’며 장담했다. 다행히 치료 결과가 좋았다. 0.1로 떨어졌던 시력이 0.7까지 회복됐다.”
그러나 소속 팀 요미우리의 신뢰는 깨진 상태다. 정리 수순을 고민하고 있었다. ‘교징(巨人,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싶다’는 소망은 이뤄지기 힘들다.
“동갑인 오 사다하루(왕정치)도 은퇴가 다가오고 있었다. 팀으로는 두 명 모두를 짊어지는 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당시 자이언츠의 사장(하세가와 지쓰오)이 장훈의 집까지 찾아간다. 사정 설명과 함께 “팀을 옮겨 달라”는 당부를 하고 떠났다.
고분고분한 장훈이 아니다. 선뜻 응할 리 없다. “은퇴까지는 몰라도, 3000안타는 여기서 하게 해 달라.” 겨우 36개가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마지막 방법이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만나주지 않는다. 무슨 일 때문인 줄 알기 때문이다.
“더 이상 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이적을 받아들여야 했다.”
(산케이신문 연재, 이야기의 초상화-장훈 편)
‘그린 회담’ 사건
요미우리가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인 이유가 있다. 막후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구단 차원이 아니다. 그룹(모기업) 오너 간의 긴밀한 얘기가 있었다.
이른바 ‘그린(Green) 회담’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장소는 도쿄 인근 시나카와의 유서 깊은 골프장이다. ‘300 클럽’이라는 이름이다. 훗날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함께 라운딩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으로 롯데 그룹 신격호(2020년 작고ㆍ일본명 重光武雄 시게미츠 다케오) 회장이 손님을 초대했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쇼리키 토루(2011년 사망) 회장이다. 그때는 훨씬 더 영향력이 막강할 시절이다. 일본 사회 전체에 그랬고, 특히 야구계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물론 둘 사이에는 이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한참 라운딩 중이다. 신 회장이 다짜고짜 돌직구를 날린다. “하리모토를 우리한테 주시오. 내가 은퇴시키고, 감독까지 맡겨 보려고….”
쇼리키 오너는 빙긋이 웃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로 얘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구단 사장이나 감독도 어쩔 도리가 없는 셈이다. 마침 팀의 형편(방향성)과도 어긋나지 않았다.
결국 트레이드는 기정사실이 됐다. 대외적으로는 본인의 결심, 혹은 결단인 것처럼 발표된다. 이듬해 1월 초다. 요미우리 구단 사무실에서 당사자인 장훈이 기자 회견을 열었다.
“스스로의 인생을 의리와 신뢰감으로 살아왔다. (요미우리에 남고 싶다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은 양쪽 구단에 상처를 줄 뿐이다.”
그렇게 이적을 받아들였다. 생애 두 번째 이적이 이뤄진다.
◇ 장훈의 선수 이력
▶ 도에이 플라이어스 (현재 니폰햄 화이터즈) 1959~1975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9년
▶ 롯데 오리온즈 (현재 지바 롯데 마린즈) 1980~1981년
전인미답의 3000안타 달성
롯데에서 2년은 역사의 시간이다.
1980년 5월 28일 가와사키 홈구장이었다. 상대는 한큐 브레이브스(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즈)다. 6회 말 1사 2루에서 투수 야마구치 다카시를 상대로 우월 투런포를 터트린다. 통산 3000번째 안타였다. NPB 사상 최초였고,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최종 누적은 3085개다. 아마 이치로가 계속 일본에서 뛰었다면 넘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ML로 건너가며, 이 기록은 불멸의 숫자로 남아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 뛰어난 이력에 비해, 지도자 경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격호 구단주가 쇼리키 회장에게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하리모토를 우리 팀에서 감독까지 시키려고 한다”는 의중 말이다.
장훈 본인의 기억에 따르면 제안이 있었다. 한 번이 아니고, 최소 두 번, 어쩌면 세 번이다.
첫 번째는 현역 은퇴 직후다. 그러니까 1981년 겨울이다. 신 회장이 친히 집으로 불렀다. “자네가 팀을 좀 맡아.”
그런데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직 감독이 되기에는 미숙하다. 당분간은 쉬고 싶다. 여행을 좀 떠나게 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2년 뒤가 두 번째다. 또다시 손사래를 친다. “공부가 부족하다. 더 시간을 달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대신할 사람이 누군지 리포트를 내라”라고 했다. 2명을 추천했고, 그중 이나오 가즈히사가 낙점을 받았다. 그게 장훈 씨의 기억이다.
세 번째가 흥미롭다. 본인도 전해 들은 얘기다.
“1989년 겨울이었다. 그룹 고위층 회의에서 차기 감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너의 아들(신동빈 회장)이 ‘하리모토(장훈) 씨에게 부탁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구단 임원이던 가네다 마사이치(400승 투수, 한국이름 김경홍) 씨가 ‘그 녀석은 하기 싫어한다. 그냥 내가 하겠다’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여론 무마용 이적’이라는 주장
거듭 감독을 마다한 까닭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권순분 여사)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며느리(장훈의 아내)에게 신신당부하셨다고 한다. ‘네 남편은 절대로 감독을 시키면 안 된다.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사코 말리셨다.”
아들의 승부욕을 익히 봤던 터다.
“(어머니는) 내 성격을 너무 잘 안다. 어렸을 때부터 못 치면 분해서 잠을 못 잔다. 엄청 파고들고, 지기 싫어하니까. 감독이 되면 더 할 것 아닌가. 사실은 나도 그렇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자유로운 게 좋은데, 늘 속박당하는 자리다. 후회는 없다.”
뜻밖의 말이 있다. 롯데로 이적한 배경에 대한 후일담이다. 역시 어느 유력 인사에게 전해 들은 말을 전제로 한다. 본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 무렵(1980년대) 롯데 그룹은 한국에서 여론이 안 좋았다. 서울 소공동에 새로 짓는 호텔과 백화점 때문이다. 이것이 정권의 특혜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궁지에 몰렸다. 아마도 (내 영입은) 그런 점을 해소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장훈의 영입’이라는 카드를 그룹의 여론 무마용으로 썼을 것이라는 본인의 해석이다.
정황은 그럴듯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롯데껌이 큰 이슈였다. 일부 제품의 성분에서 쇳가루와 모래 가루가 검출되며, 불량식품 단속 대상이 됐다. 이로 인해 청와대로 불려 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반전의 기회가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격호 회장에게 호텔과 백화점 건설을 지시했다. 일본에서 모은 재산을 고국에 환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롯데 그룹에게는 국내 시장을 넓힐 기회가 된 것이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중에서 발췌.)
정체성에 관한 사실 관계
‘여론 무마용 이적’은 어디까지나 장훈 씨 본인의 자의적인 뜻풀이가 담겼다.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은 어렵다.
다만 실체적인 팩트는 뚜렷하다. 선수 생활 막판에 그를 데려간 곳이 롯데였다. 덕분에 대기록 달성이 가능했다. 그리고 은퇴 이후에도 거듭 감독 자리를 제안했다. ‘여론 무마용’이 사실이라고 해도, 더 이상 필요한 시점은 아니었다.
끝까지 챙긴 것은 아마도 약속, 신뢰에 대한 문제일 것 같다. 그리고 그룹의 창업주와 같은 핏줄이라는 유대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물론 신격호 회장에 대한 평가는 분분할 것이다. 다만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가 제법 분명하다. 일본말과 이름을 쓰기도 했지만, 평생 자신의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반면 장훈 씨는 조금 다르다. 오랜 시간 한국인임을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인가 뜻이 달라졌다. 나름대로 이유를 밝혔지만,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