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퍼펙트 데이
청소 몰입하는 영화 주인공
내 안의 상처와 마주하기
새해엔 용기 내보고 싶어

최근에 이주란 작가의 '겨울 정원'을 읽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마음이 뭉클해졌다. 비관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 대책 없는 낙관주의에 빠지지도 않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는 빔 벤던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 혜숙은 건물 청소를 하는 여성인데, 혜숙의 딸이 청소부(영화 주인공은 화장실을 청소하지만)가 나오는 '퍼펙트 데이즈'를 보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혜숙은 그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과 직업만 같을 뿐, 본질적으로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여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혜숙의 반응을 보면서, 어쩐지 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영화를 개봉 당시 친구들과 함께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나 맨날 내 직업에 불평불만만 했는데 앞으로는 일을 좀 열심히 해봐야겠어. 영화 주인공이 매일매일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나는 어떤 영화 혹은 어떤 예술 작품이 이런 식으로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 (항구적이지는 않더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감독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척 행복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가당치 않은 부러움도).
그렇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내가 한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나는 그 영화가 삶을 이루는 사소한 희망의 편린들을 향하는 게 아니라, 끝없는 비관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종교적 제의라도 하는 것처럼 하루의 루틴, 삶의 루틴을 철저히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지워가려는 의지의 다른 표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그는 과거에 이미 너무 많은 좌절과 상실을 겪었고, 상처를 받았다. 그러한 좌절과 상실, 그리고 상처가 자신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그는 견고한 성을 쌓는 중이 아닐까? 감정의 파고를 일으킬 외부의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하지만 삶은 그런 식으로 만만하지 않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외부 요인들은 그가 상실을 경험한 적이 있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그는 운다. 마지막 장면, 그는 매일 아침 그러했던 것처럼 차에 올라타고 음악을 튼 후 운전을 하다가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의 표정은 오묘하다. 울면서 웃는 것 같고 웃으면서 우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장면이 너무 슬펐다. 그건 아무리 자신을 보호하려고 열심히 성을 쌓는다 한들 결국엔 허물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직조된 세계 속에 어쩔 수 없이 던져져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감정만은 아니었다.
나를 견딜 수 없이 슬프게 한 건, 그가 우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마음 놓고 울게 되면 과거의 침입에 속절없이 당하게 될까봐, 겁이 나서. 어쩌면 제대로 울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과 맞닥뜨릴 수 있는 용기, 내 삶이 실패한 적이 있고,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 준 적이 있고, 상처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용기.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인정할 수 있는 용기. 모든 삶의 루틴을 멈춰도 남아 있는 어떤 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물론 그 영화를 보고 그런 감정을 느낀 건 나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어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 새해 다짐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그런 용기를 내보자고, 그런 용기를 내기 어렵다면 그런 용기를 낼 용기를 내보자고. 과연 그게 될까? 잘 모르겠다. 내년 이맘때 나는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손보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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