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더운 여름,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 자연과 역사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쉬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 바로 붉게 타오르는 배롱나무 꽃이다.
백일홍이라 불리는 이 꽃은 7월부터 100일 동안 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과 화려한 자태로 여름을 대표하는 꽃으로 손꼽힌다.
전국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경남 함안의 고려동유적지는 배롱나무 명소 중에서도 단연 특별한 곳으로 꼽힌다.

함안에 위치한 고려동유적지는 단순한 유적지를 넘어, 여름이면 붉은 꽃으로 물든 감동의 풍경으로 변신한다.
여기를 찾는 이들은 담장을 넘는 백일홍의 위용에 먼저 감탄하고, 그 속에 깃든 이야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빼앗긴다.

이곳은 고려가 멸망한 후, 충절을 지키기 위해 은둔한 진사 이오 선생의 자취가 서려 있는 장소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이 깃든 이 유적지에서, 마치 수호신처럼 웅장하게 자리한 배롱나무는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려동유적지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하는 투어도 놓치지 말자.
유적지 앞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에서는 매주 토·일요일, 매시 정각마다 깊이 있는 해설을 들을 수 있다(점심시간 제외).
백일홍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면,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배롱나무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전통 한옥이나 사찰과 어우러질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고려동유적지의 자미정 또한 그러하다.
백일홍의 진분홍 꽃잎은 고택의 검은 기와와 대비되어 자연과 건축이 만들어낸 조화로운 풍경을 완성한다.
특히 여름 햇살 아래 흔들리는 꽃잎은 고요한 마루 위에서 바라볼 때 더욱 빛난다.

많은 사찰과 고택에서도 배롱나무를 볼 수 있지만,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경관 때문만은 아니다.
붉은 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에 과거의 기억이 실려 있는 듯한 이 공간에서는, 단순히 ‘예쁜 꽃’을 넘어선 깊은 울림이 있다.
백일 동안 지지 않고 피어나는 꽃처럼, 이오 선생의 충절과 고려인의 삶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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