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연기관 차량의 무분별한 주차로 전기차 충전 스트레스가 안그래도 심한데 충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관련 규정이 너무 허술합니다. 전기차 충전소 바닥에 '녹색 ‘EV 전기자동차’ 표시가 없으면 충전 방해로 신고해도 단속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요."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거주하는 테슬라 운전자 A씨는 얼마전 차량 충전을 위해 찾아간 인근 테슬라 슈퍼차저 앞에 주차된 내연기관 차량 때문에 충전을 할 수 없었다. 현행법 상 전기차 충전소에 일반 차량이 주차를 하면, 충전 방해 행위로 분류돼 과태료를 부과받는다. 이에 따라 A씨는 수성구청에 충전 방해 차량을 신고했지만, 구청 관계자로부터 "해당 충전소는 충전 방해 단속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곳"이라는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충전소 바닥에 '녹색 ‘EV 전기자동차’ 표시가 없으니 단속할 필요가 없고, 과태료를 부과해야할 의무도 없다는 논리였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앞서 충남 천안시에서도 있었다. A씨와 유사한 사례를 겪은 또다른 테슬라 운전자가 천안시청에 전기차 충전방해 신고를 하자 천안시청은 되려 "앞으로 전기차 충전구역에 법으로 규정된 녹색 충전구역 표시가 없을 경우, 내연기관차의 전기차 충전구역 주차에 대한 과태료 부과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전기차충전방해 금지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전기차 사용자가 점차 늘어나고 관련 인프라가 확충되고 있음에도 충전 관련 입법이 여전히 미비하기 때문이다. 앞서 수성구청과 천안시청이 "정부가 규정한 EV전기자동차 표기가 없다면, 내연기관 차량이 충전 방해를 해도 단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린 결정은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 내 제18조의8 2항에 위배된다. 이 시행령에 따르면 시·도지사는 충전구역에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구획선 또는 문자 등을 (전기차 충전소 바닥면에) 표시하여야 한다. 또 산업부 장관이 정한 구획선 또는 문자 표시 규격은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요건 등에 관한 규정’ 제9조에 나와 있다. 주차장법 시행규칙 제3조제1항을 지키되 녹색바탕에 흰색 실선과 문자(EV 전기자동차)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규정한 충전소 주차면 바닥 표시 규격을 지키지 않은 전기차 충전소는 전국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서초구 센터필드에 설치된 슈퍼차저 주차면 바닥에는 녹색 EV전기자동차 표기 대신 테슬라 고유의 충전 마크 디자인이 새겨져 있다. 잠실 롯데월드몰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메르세데스-EQ 충전소의 주차면 바닥도 검정색이다. 심지어 강남구 학여울역 SETEC 내부에 설치된 환경부 급속충전기 바닥면은 파란색이다.
'주차면 규격' 규정이 무색할만큼 충전소 주차면 바닥 색깔과 디자인이 제각각인건 현행법이 주차면 바닥 규격을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패널티'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법에 따르면 전기차 충전소 의무 설치 대상으로 지목된 곳이 전기차 충전소를 설치하지 못할 경우, 지방자치단체가 설치 업체를 대상으로 3000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하지만 지자체가 충전소 주차면 바닥 규격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는 아예 해당 사항이 없다.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전기차 충전소 설치 업체에게 그 어떤 이행강제금도 부과되지 않으니, 전국의 충전소 주차면 바닥이 '녹색 EV전기자동차'로 통일될 수 없는 것이다.



전국 지자체 가운데 서울시와 제주도만큼은 주차면 바닥 규격과 상관 없이 모든 충전소 주차면을 단속 대상에 포함시켰다. 한 서울시 관계자는 "충전소 규격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행강제금이 부과된 사례는 없다"면서도 "남녀노소 누구나 전기차 충전 장소임이 식별이 되면, 전기차 충전 방해 행위를 단속할 수 있는 지역이 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이와 같은 단속 방침을 최근 25개 자치구에 모두 전달했다. 제주도 또한 최근 '충전소 주차면 바닥 규격'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전기차 충전소를 대상으로 전기차 충전방해금지 행위 단속을 강화했다.
전문가들은 부실한 입법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박기태 교통전문 변호사는 "모든 전기차 충전소 바닥면에 대한 기준을 권고 형태가 아닌 의무사항으로 전환하거나, 아예 없애는 것이 앞으로 생길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카이즈유 데이터 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기차 신차등록대수는 7만8466대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3.7% 올랐다. 자동차 제조사별로 앞으로 더 많은 전기차 출시를 예고한 만큼, 국내 도로를 주행하는 전기차의 모습은 해가 지날수록 더 많아질 전망이다. 현재 전기차 충전방해금지법에서 발견되고 있는 '구멍'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전기차 충전 대란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Copyright © 블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