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콘 선주민들의 삶 박물관을 뛰쳐나오다

서현우 2024. 10. 2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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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유콘? New콘!] 다시 주목받는 그들의 이야기와 문화
범고래 부족 토템을 설명하는 게리 존슨씨.

유콘에는 자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도 무척 흥미롭다. 예전에는 1896년부터 1899년까지 문명의 기틀을 닦게 만들었던 골드러시가 그 핵심을 담당했다. 마치 현재의 비트코인 열풍과 같은 사건이다. 한 몫 크게 잡으려는 욕망에 가득한 10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3년 동안 유콘에 몰려들었다가, 적은 채산성에 실망하고 다른 금광 소식을 좇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4만 명에 이르던 도슨 시티 주민 수가 단 몇 년 만에 4,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지금은 더 이상 골드러시가 핵심이 아니다. 이제는 선주민들의 이야기와 문화가 전면에 내세워지고 있다. 선주민들이 운영하는 숙박업소나 액티비티, 문화센터가 지역 곳곳에 들어선다. 그간 박물관에 찢어진 채로 있었던 드럼이 다시 울리고 있는 것이다.

유콘 선주민들의 문화와 유물들이 집결된 헤인스 정션의 다 쿠 문화센터.

레지던셜 스쿨이 끊어놓은 세대의 허리

사람들이 선주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선주민들이 이에 대해 대답해 줬는데, 그중 가장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말은 "그동안 듣지 않았었기 때문"이란 것.

그들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오직 현장에만 있다. 그래서 직접 유콘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주민을 만나 직접 들어봤다. 게리 존슨, 키스 울프 스마치, 토미 테일러, 재키 올슨, 론 챔버스, 메리 제인 존슨, 테리-리 아이작, 게리 베일리 등 모두 현재 유콘의 선주민 집단들을 선도하고 있는 이들이다.

먼저 이들의 상황을 숫자로 보자. 선주민들은 땅을 잃었다. 1만 년 전부터 유콘에 살아왔으나 100여 년 전 들이닥친 이들이 대부분의 땅을 가졌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거나, 광산업체가 통으로 구매하거나, 국공유지가 됐다. 그래서 현재 선주민들이 소유하거나 통제하고 있는 땅은 전체의 6.5%에 불과하다.

선주민 론 챔버스씨

그들은 이름도, 언어도 잃었다. 19세기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운영됐던 레지던셜 스쿨(기숙학교)에 의한 결과다. 상당수의 선주민 아이들이 부모와 생이별하고 이곳에 보내졌다. 그리고 거기서 선교사나 관리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충 지어준 영어식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말 대신 영어를 배웠다. 이 결과 현재 선주민 중 단 12%만이 자신들 고유어를 구사할 수 있다. 그나마 완벽하게 말할 줄 아는 이는 부족에서도 나이 많은 일부뿐이다. 또 선주민들이 부르던 땅 이름도 전부 영어식으로 바뀌었다. 가령 강과 고속도로 등에 붙은 '클론다이크Klondike'는 원래 선주민들이 부르던 '트론뒷Tr'ondëk'을 이주해온 이들이 잘못 알아들어 변한 것이다.

최근엔 선주민들의 주요 식량인 연어도 잃었다. 기후변화로 인해 유콘강의 수온이 높아졌고, 그로 인해 연어는 급감했다. 보트투어를 운영하는 테리-리씨는 "원래라면 민토마을 앞에서 매년 2,000마리 정도 연어를 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이것이 80마리로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론 챔버스씨는 본인이 수집한 실제 선주민들이 사용했던 돌칼, 화살촉 등을 설명해 줬다.

또 메리 제인 존슨씨는 "빙하가 녹으면서 기존의 물길이 바뀌는 등 여러 영향으로 인해 클루아네호수의 수위가 수십 피트 내려가 마른 바닥이 보일 지경"이라며 "우린 거의 4년간 연어를 전혀 못 보고 있다"고 전했다.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 중인 선주민들에게 치명적인 변화인데, 이들과 충분한 대화 없이 올해 초 '향후 7년간 연어잡이를 금지한다'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또 자식도 잃었다. 유콘 인구 4만6,000여 명 중 선주민들은 25% 정도인데, 2022년 알코올 및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25명 중 17명이 선주민이었다. 게리 베일리씨는 "딸을 펜타닐 중독으로 잃었다"고 했고, 재키 올슨씨는 "레지던셜 스쿨을 졸업한 어머니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다"며 "그런 엄마의 모습 때문에 가정을 꾸리는 것이 무서워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결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재키 올슨씨.

선주민들이 이처럼 알코올 및 약물 중독에 취약한 것은 과거 레지던셜 스쿨의 존재로 인해 대대로 내려져오던 가족문화가 일거에 단절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기숙학교에 들어가면 대부분 5~6년 동안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쭉 있었다고 한다. 차보다 말을 더 자주 타던 시대에 피싱캠프, 헌팅캠프 등을 오가며 생계를 유지하기 바쁜 부모들을 어린 아이가 찾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초기 이주자들은 선주민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1901년 건축된 도슨 시티 커미셔너 레지던스에서 진행하는 '레드 서지, 레드 테이프 투어' 도중 들을 수 있는 과거 성공회 주교 윌리엄 봄파스와 노스웨스트 기마경찰 찰스 콘스탄틴의 대화에서 가늠할 수 있다. 콘스탄틴이 실제 했던 말이다.

"저는 유콘에서 열심히 일하는 백인들을 위해 법과 질서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니 '인디언'들은 모두 섬으로 옮겨야 합니다. 백인들이 여기에서 일자리와 기회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템 조각가 키스 울프 스마치씨.

어떤 토템이 가장 높은지 아무도 몰라

점점 옅어져 갔던 선주민들의 역사와 문화가 다시 색을 찾게 된 건 최근 몇 년이다. 앞서 언급한 선주민들이 모두 구심점 역할을 했다. 선주민들의 문화와 유물들이 각 거점마을마다 세워진 센터들에 집결됐다. 도슨 시티에는 다노자 조 문화센터Dänojà Zho Cultural Centre, 헤인스 정션에는 다 쿠 문화센터Da Kų Cultural Centre, 커크로스에는 하 사군 히디Haa Shagóon Hídi(영문명 Carcross Tagish First Nation Campground) 등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 총 14개 부족으로 구성된 유콘 선주민들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그중 6개 부족이 자리 잡고 있는 하 사군 히디에는 각 부족을 뜻하는 6개의 토템과 1개의 환영 토템이 건물 밖에 솟아 있다. 게리 존슨씨는 "맨 왼쪽에 있는 토템은 환영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며 "조각된 인물이나 동물들은 모두 손과 발을 내밀고 있는데 이것은 '너를 해치지 않겠다'는 전통적인 의미"라고 했다.

"그 외 6개는 각각의 부족clan을 의미합니다. 이곳 선주민들은 부족 위에 '일파moiety' 개념이 있어요. 범고래Daklaweidi, 늑대Yen yedi는 '늑대Gooch 일파'고, 비버Deisheetaan, 큰까마귀Ganaxtedi(Raven), 까마귀Kookhittaan(Crow), 개구리Ishkahittan 부족은 '까마귀Yeitl 일파'입니다. 다른 부족끼리 결혼해도 되는데 그러면 자식들은 엄마 부족을 따르게 됩니다."

한국에서 온 일반인도 부족에 가입할 수 있냐고 묻자 게리 존슨씨는 "입양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유콘에서 가장 높은 토템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는 "토템 조각가들의 불문율이 바로 높이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라며 "높이 경쟁을 막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답했다.

쉽 마운틴에서 만난 메리 제인 존슨씨.

선주민들은 전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우화에 가깝다. 메리 제인 존슨씨는 까마귀 몸 색깔이 검정색인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레지던셜 스쿨의 병폐를 타파하기 위해 유콘 퍼스트네이션(선주민) 교육학교를 건립한 인물이다.

"옛날에 큰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어요. 당시엔 모든 동물이 색이 없을 때였죠. 그래서 서로 못 알아보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 큰까마귀는 이를 해결하고자 땅에 있는 색을 본 따서 다른 동료 새들을 칠해 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모든 새들을 칠하고 이제 본인을 칠할 차례가 왔는데 큰까마귀는 무슨 색으로 할지 한 달 이상 고민에 빠졌죠. 그러자 이를 답답하게 여긴 다른 새들이 그에게 세상의 모든 색을 다 부어줬어요. 그래서 큰까마귀가 검은색이 된 것입니다."

참고로 이야기는 100% 완벽하게 외울 필요가 없다. 구전되는 이야기들이 늘 그렇듯, 말할 때마다 바뀐다. 그리고 오히려 그걸 권한다. 똑같은 이야기가 정답처럼 전해지는 것보다 본인의 교훈과 재량을 녹여서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라는 주문이다. 다만 그 이야기 안에 담긴 마음과 지혜만 전해지면 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말라붙은 클루아네호수. 최근 급감한 연어 개체수와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무소유가 근본인 유콘 선주민 정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 "기꺼이, 재밌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콘에 다섯 명 남아 있다는 숙련 토템 조각가 키스 울프 스마치는 "42년간 일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젊을 때는 내 부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강박에서 벗어났다. 그저 내 부족의 문화와 상징을 나무에 꼭꼭 눌러 담는 이 일들이 즐거울 뿐"이라고 전했다.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의 근본적인 정신은 무소유다. 가령 80마리의 연어를 잡았고, 내가 겨울을 지내는 데 10마리만 필요하다면 나머지 70마리를 이웃이나 다른 부족들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그들 역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준다. 그게 이들의 정신이다. 커뮤니티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먼저 고민한다. 1년 중 절반이 겨울이며, 그마저 해가 4시간밖에 뜨지 않는 얼어붙은 땅에서, 그들이 택한 방한대책은 서로의 온기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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