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판 IRA' CRMA 초안 공개…"한국산 전기차·배터리 괜찮을까"
유럽연합(EU)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로 불리는 '핵심원자재(CRMA·Critical Raw Materials Act)' 초안이 마침내 공개됐다. 중국산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의 IRA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지만, 국내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에선 대한민국 차별 조항이 없다고 하지만, 산업계에선 세부조항이 나오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17일 외신에 따르면 EU는 16일(현지시간) 역내 전략원자재 공급망 강화를 골자로 한 'CRMA'와 친환경 산업 규제 간소화 방안 등을 담은 '탄소중립산업법' 초안을 잇달아 공개했다. 특정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고, 핵심 원자재의 'EU내 가공' 비중을 대폭 늘려 원자재 공급망 안정·다각화 대책을 추진하는 것이 핵심이다.
CRMA 초안에 따르면 이차전지용 니켈, 리튬, 천연흑연, 망간, 구리, 갈륨, 회토류 등 16가지 원자재가 '전략적 원자재'로 분류됐다. 하지만 EU는 현재 희토류 98%, 리튬 97%, 마그네슘 93% 등 전략적 원자재 대부분을 중국산에 의존하고 있다.
EU 집행위는 2030년까지 종류·가공 단계를 불문하고 특정한 제3국산 전략적 원자재 수입 비율을 역내 전체 소비량의 65% 미만으로 제한하는 것이 목표다. 다만 "65%"라는 목표치는 '벤치마크'(기준점)일뿐, 의무 상한선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CRMA 초안은 'EU산 원자재' 확대 의지도 담고 있다. 전략적 원자재의 경우 2030년까지 EU 전체 연간 소비량 대비 역내 채굴량 최소 10%, 가공량 40%, 재활용 비율 15% 이상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EU 집행위는 특히 전기차 모터의 필수 부품으로 꼽히는 영구자석에 대해서는 별도 조항에서 '재활용 비율·가능 역량'에 관한 정보공개를 의무화했다. 또 향후 재활용 확대를 위해 폐기물 규정 수정, 아예 제품 디자인 단계에서 '친환경 디자인' 요건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CRMA 초안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는 "IRA와 달리 역외 기업에 차별적인 조항이나 현지조달 요구 조건 등이 포함되지 않는다"며 "탄소중립산업법도 EU 내 기업과 수출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될 것 같다"고 평가했다.
산업부는 2022년부터 민관합동, 전문가 등 간담회에서 CRMA 대응 의견을 수렴해왔다. EU측에도 투자와 인허가, 인센티브 등이 비차별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점과 노동환경 규범이 조화돼야 한다는 우리측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배터리·전기차 생산 대기업, CRMA 세부안 공개 '촉각'
반면 산업계에선 CRMA 초안이 공개되자,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특히 초안에는 500명 이상, 연간 매출 1억5000만유로(약 2100억원) 이상인 역내 기업에 대해서는 공급망 감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면서, 국내 대기업은 피하기 힘들게 됐다. 특히 배터리 업계에선 핵심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와 폐배터리 재활용에 대한 '비상'이 걸렸다. 폴란드(LG에너지솔루션), 헝가리(SK온·삼성SDI) 등에 생산공장이 있기 때문에, 수시로 공급망에 대한 감사를 실시할 경우 경영상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현재 국내 이차전지 소재는 중국산 의존이 높은 상황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중국에서 수입한 수산화리튬은 총 32억3000만달러로, 전체 수입액(36억8000만달러)의 87.9%에 달했다. 2021년 중국산 수산화리튬 수입 비중(83.8%)보다 4.1% 포인트(P) 높다. 수입액도 전년 대비 5.8배 커지면서 중국산 수산화리튬 의존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이차전지 주요 양극재인 니켈, 코발트, 망간도 중국산 수입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2018년 전구체로 활용되는 고순도 니켈은 93% 이상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코발트도 대중 수입 비중이 전체의 72.8%를 차지한다. 이차전지 음극재인 천연흑연도 전체 수입의 94%를 중국에서 가져온다. 사실상 중국산 원재료 없이는 국내 이차전지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 셈이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은 지난해 11월 미국 '컴파스 미네랄'과 탄산리튬에 대한 장기 공급 계약을 맺었다. 2025년부터 6년 동안 컴파스 미네랄이 만든 탄산리튬(연간 약 1만1000톤 예상)의 40%를 공급받는다. 1년에 약 4400톤(t) 규모다. 두 회사는 하이니켈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수산화리튬 공급계약도 추진하기로 했다.
LG엔솔은 10월 호주 '시라'와 천연흑연 공급 업무협약(MOU)을 맺고, 2025년부터 천연흑연 2000톤을 공급받으면서 중국산 비중을 낮출 계획이다. 이 밖에도 △캐나다 광물업체 '일렉트라·아발론·스노우레이크'와 황산코발트 7000톤·수산화리튬 25만5000톤 △캐나다 시그마리튬 리튬정광 69만톤 △독일 '벌칸에너지' 수산화리튬 4만5000톤 △호주 '라이온타운' 리튬정광 70만톤 등을 확보했다.
SK온도 2023년부터 2027년까지 칠레 유일의 수산화리튬 생산 기업 'SQM'으로부터 고품질 수산화리튬 5만7000톤을 공급받는다. 이는 전기차 약 120만 대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또 호주의 '레이그 리소스'에 지분 10%를 투자키로 하고 2024년 4분기부터 10년에 걸쳐 리튬 23만 톤을 공급받는 계약도 맺었다.
이 밖에도 △호주 '글로벌 리튬'과 안정적 리튬 수급을 위한 MOU △스위스 '글렌코어'와 코발트 구매 계약 △포스코홀딩스와 이차전지 사업의 포괄적 업무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등을 맺으며 배터리 핵심 원소재 공급망을 꾸준히 강화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 업계는 세부조항 발표 전까지 촘촘히 대비한다는 계획이다. CRMA 초안에는 전기차 모터의 필수 부품으로 꼽히는 영구자석 재활용 비율과 재활용 가능 역량에 관한 정보 공개 요건이 별도 조항으로 포함됐다.
체코에서 전기차를 생산 중인 현대차, 2025년 슬로바키아에서 전기차 생산을 계획 중인 기아는 CRMA를 피할 수 없다. CRMA 초안이 확정되기 위해선 EU 집행위와 유럽의회, EU 27개국으로 구성된 이사회 간 3자 협의를 거쳐야 하는 만큼 현대차·기아는 향후 상황을 지켜보고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