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조헌 절의를 숭상한 선비, 은봉 안방준

관직에는 고작 19일 근무했는데 공조참의를 제수받고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과거 합격자도 아닌데 시호를 받고,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까지 남긴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박광전·임계영의 의병 부대의 종사관으로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출병했다. 평생 절의의 삶을 실천한 진유(眞儒)로 평가받고 있는 전남 보성 출신의 은봉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그다.

진유로 평가받는 안방준은 1573년(선조 6) 보성읍 우산리에서 진사 안중관과 진원박씨 사이에 태어난다. 조부는 남원부사를 지낸 안축이고, 증조부는 의정부 사록을 지낸 안수륜이다. 사마시(생원·진사)에 합격했지만, 아들이 없이 일찍 죽은 숙부 안중돈에게 입양된다.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집안이니 명문 가문이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 집안인 죽천 박광전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매부인 박종정에게 성리학을 배운다. 박광전은 퇴계(이황) 학파를 계승한 인물이었고, 박종정은 제봉 고경명의 제자였다.
16살 되던 해 향시에 나아갔지만, 시험장의 문란함을 보고 부끄럽게 여겨 과거를 포기한다. 그리고 경기도 파주에 살던 당대 최고 스승인 우계 성혼을 찾아 문하가 된다.
성혼의 문하에서 그는 후일 인조반정의 공신이 된 김류, 이귀, 김자점과 반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저명한 성리학자가 된 김집 등과 사귄다. 후일 안방준은 김집과 함께 송시열·송준길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인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안방준은 인조와 효종 대에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는다. 1623년(인조 1), 인조 즉위 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의 부름도 집요했다. 인조 3년에는 오수도 찰방과 사포서 별제를, 인조 17년에는 전생서 주부를, 효종 즉위년에는 사헌부 지평을, 효종 2년에는 사헌부 장령을, 그리고 효종 4년에는 정3품 당상관직인 공조참의를 제수한다.
이 중, 그가 유일하게 취임한 것은 종6품 오수도 찰방이었고, 그것도 고작 19일 만이었다. 그리고 한양과는 발걸음을 끊는다.
이는 인조 3년(1625)의 “반정 뒤에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거나, 효종 즉위년(1649)의 “인조 때 기절(氣節)이 있다고 천거해 여러 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 직(사헌부 지평)을 택배했으나 또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는 실록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초야에 묻힌 그가 조정의 부름을 받았던 것은 기절, 즉 기개와 절의 때문이었지만 평생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조정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효종 3년(1652), 대동법의 삼남지역 확대를 반대하고, 무차별한 유민의 추쇄를 파해 주기를 청하는 상소도 그 쓴소리였다.
- 병자호란 의병장이 되다
안방준의 나이 20세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나주의 김천일, 광주의 고경명이 거병했다.
김천일은 북상해 도성 근처에서 활동했고, 고경명은 거병 한 달 만인 동년 7월10일 금산전투에서 아들 인후와 함께 순국한다. 고경명 의병이 와해되자 보성에서 박광전이, 화순에서 최경회가 의병을 일으킨다.
박광전 의병은 전라좌의병, 최경회 의병은 전라우의병이 된다. 박광전은 당시 67세의 고령이어서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천, 지휘하게 했다.
전라좌의병장 박광전은 이미 살핀 것처럼 안방준의 어린 시절 사부였다. 그는 박광전·임계영의 종사관이 돼 관군과의 연락을 담당했다.
당시 전라·충청·경기의 관군을 총괄 지휘했던 3도 체찰사는 정철이었다. 정철은 3도 체찰사의 체부(體府)에 드나들면서 군사 계책을 낸 안방준의 식견을 높이 평가했다.
뿐만 아니다. 안방준은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직접 의병장으로 참전한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안방준은 조정으로부터 랍서(蠟書, 비밀누설과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밀랍으로 싸서 봉합을 한 문서)를 받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 의병과 곡식을 모은다. 의병창의대장에는 안방준, 참모관에는 선시한, 종사관에는 김유신 등이 추대된다. 안후지, 안신지, 안심지는 서기였는데, 모두 안방준의 아들이었다. 안방준 의진에 참여한 분 중 이름이 알려진 분만도 150명이 넘는다.
안방준은 수백 의병을 이끌고 여산까지 진군했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온다.
- 포은과 중봉의 절의를 숭상하다
오늘 안방준을 기리는 핵심 키워드는 ‘절의’다.
이는 당대 사관이 ‘조선왕조실록’에 남긴 안방준의 ‘졸기’의 내용, “성품이 꿋꿋하고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평생토록 포은 정몽주와 중봉 조헌을 사모했다”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안방준이 정몽주와 조헌을 얼마나 숭모했는지는, 정몽주의 호에서 ‘은’자를, 조헌의 호에서 ‘봉’자를 취해, ‘은봉’을 자신의 호로 삼고 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는 결코 둘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중심으로 충절들을 기리기 위한 저술활동에 일생을 바친다. 말년에는 능주 매화정에 은봉정사(隱峯精舍)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며 절의 추승 작업에 몰두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박광전·임계영의 참모로 임진왜란에 직접 참여한 그는 호남인들이 중심이 된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내력을 기록한 ‘진주서사’를 비롯 ‘삼원기사’, ‘호남의록’, ‘부산기사’, ‘노량기사’, ‘임진기사’ 등의 기록을 남긴다.
이들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호남인들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다. ‘호남의록’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항전하다 순절한 최경회, 정운, 황진, 장윤, 안영 등 16인의 사적을 약술한 것이다.
쇠락해 가는 사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조광조 등 기묘사화와 관련된 기묘제현의 사적을 수록한 ‘기묘유적’과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면서 대책을 강구한 조헌의 글을 모은 ‘항의신편’ 등도 남긴다.
안방준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가는 대단하다. 안방준의 사부였던 성혼은 “안방준은 나에게 배울 사람이 아니다. 나를 깨우칠 사람”이라 했고, 김류는 “청송 성수침 이후 제일가는 사람”, 민정중은 “호남에서 100년 사이에 이 어른을 다시 얻기 어려울 것”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안방준의 평가는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홍직필은 “호남의 학문에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은봉 안방준, 손재 박광일이 가장 두드러진다”면서 안방준을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평가했다.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황의동은 “말과 글이 아니라 삶과 실천으로 보여줬고, 현실적 이해나 세속적 가치를 초월해 인간 본성의 의리를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삶 속에서 진유(眞儒)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안방준은 당대인에게만 아닌 후대의 석학, 그리고 오늘 현대 학자들에게마저 도학과 절의의 삶을 실천한 진유로 기려지고 있다.
오늘 안방준이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유다.
안방준 후손들의 활동도 대단하다.
일제에 의해 광주천 모래사장에서 총살당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인 기삼연 의병장의 시신을 거둔 안규용과 머슴 출신 의병장으로 유명한 안규홍, 국회의원이면서 국방부장관인 안규백, 서예가인 송국 안규동, 낙안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안규삼·안규진은 10대손이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480명을 풀어주었던 ‘한국판 쉰들러’인 안종삼은 11대손, 광주광역시 교육감을 지낸 안준은 12대손,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지낸 안병욱 교수와 전남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안진오는 13대손이다. 전남대학교 법대 학장을 지낸 안용섭은 14대, 여수·목포시장과 광주 부시장을 지낸 안재호는 15대 종손이다.
안방준의 출생지인 보성읍 우산리에는 안방준의 종가, 불천위 사당, 대계서원(大溪書院)이 있다.


안방준의 도학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1657년(효종 8) 건립된 대계서원은 1704년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었지만,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린 것을 2012년 복설한 것이다. 사당 이름 ‘祚文祠’(조문사)’는 송준길의 글자를, ‘大溪書院’(대계서원) 현판은 숙종의 어필을 집자했다. 대계서원에는 안방준이 쓴 입을 경계하는 글인 ‘구잠’(口箴)을 새긴 비도 있다.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言而言), 말해서 안 될 때는 말하지 말라(不言而不言). 말해야 할 때 말 안 해서도 안 되고(言而不言不可), 말해서 안 될 때는 말하면 안 된다(不言而言亦不可). 입아, 입아(口乎口乎), 그렇게만 하여라(如是而已).” 입을 경계하는 안방준의 ‘구잠’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안방준이 사망한 지 2년 만인 1656년(효종 7), 능주와 인근 고을의 선비들이 은봉을 추모하기 위해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도산사(道山祠)라는 사우를 건립한다. 대계서원 건립 1년 전이다. 능주목사 노문한이 사우의 상량문을 지었다.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한 채 도산사 유허비만이 남아 있다.
그를 기리는 서원은 또 있다. 1670년(현종 11), 호남 유생들의 공의로 안방준과 최산두·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화순군 동복면 연원리에 설립한 도원서원이 그것이다. 도원서원은 임억령을 추가 배향한 뒤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지만, 대원군 때 훼철됐고, 1976년 복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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